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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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25
  • 영산강닷컴 정문찬기자
  • 승인 2024.03.0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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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투쟁 5·18민중항쟁과 남평 사람들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광주의 시민과 대학생들은 5월 18일부터 신군부의 민주화 운동 탄압에 맞섰다. 신군부는 공수 부대를 투입하여 시위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사람까지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끝내는 발포까지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시위대는 21일부터 무장을 시작하였다.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철수하면서 도청을 접수한 시위대는 시민 수습 대책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위원회는 무기를 회수하고 시내 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 대회를 열어 비상계엄 철폐와 민주 헌정 체제의 회복을 요구하였다.

광주 시민은 외부와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음에도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고 치안을 확보함으로써 성숙한 시민 의식과 공동체 정신을 보여주었다. 시민 수습 대책 위원회는 평화로운 수습을 위해 계엄군과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계엄군은 27일 새벽 도청에서 저항하던 시민군을 전차까지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5.18민중항쟁은 이후 민주화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일부 대학생은 계엄군의 무력 진압에 대해 군사 작전권을 가진 미국에도 책임이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이는 반미 운동이 나타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국립5.18민주묘지
국립5.18민주묘지

 

 

5.18민중항쟁의 전개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대학생을 중심으로 10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해 계엄 해제와 유신 세력의 퇴진을 요구했다. 4·19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앞서 4월 24일 서울 지역 대학교수들이 학원 민주화 성명을 발표했고, 5월 16일에는 군사 정권의 재등장에 반대하는 지식인 134명이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오랜 독재에 짓눌린 시민들의 민주화 욕구가 거세게 분출되자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에 따라 신군부는 주요 대학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학생운동 지휘부와 정치권의 주요 인사 검거에 나섰다. 학생들이 잇따라 체포되고, 김대중, 김종필 등이 권력형 부정 축재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5월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대학생과 계엄군 사이에 충돌이 빚어지면서 이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불씨가 지펴졌다. 신군부의 계엄 확대 조치로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학생 200여 명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들이 학생들을 무차별로 구타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광주 시내 금남로에서 민주화 시위로 이어졌고, 계엄군의 과잉 진압에 격분한 시민들까지 가세하면서 시위대는 갈수록 불어났다. 이들은 계엄 철폐와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곳곳에서 계엄군과 대치했다. 오후 3시 무렵부터 계엄군은 골목까지 쫓아다니며 학생과 시민들을 곤봉으로 마구 때리고 차에 태워 강제로 끌고 갔다.

19일에는 대학생과 시민은 물론 고등학생까지 가세해 시위대가 5,000여 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금남로와 계림동, 충정로 등지에서 계엄군과 대치했다. 계엄군은 소총에 칼을 부착하고 장갑차를 앞세워 시위대를 위협했으며, 가톨릭센터와 공용터미널 주변 등 곳곳에서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다.

20일 오후 광주 시내 중심가에는 10만여 명이 사람들이 연좌 농성을 벌였다. 택시 200여 대가 일제히 경적을 울리며 시위에 가세했다. 노동자와 도시 빈민, 회사원, 점원, 주점 종업원 등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하여 초기의 학생 시위는 이미 민중 항쟁으로 진전되어 있었다.

이날 밤 20만 명 규모로 불어난 시위대는 노동청과 신역, 전남도청 앞 등지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계엄군의 총칼에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맞섰다. 자정을 전후해 계엄군은 건물 옥상에서 장갑차에 올라탄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21일이 되면서 시위대는 본격적인 무장 항쟁을 벌였다. 이들은 나주, 영산포, 화순 등지의 경찰관서에서 카빈총과 M1소총 800여 정과 탄환 5만여 발을 탈취해 시위 현장에 반입했다. 또한 시위대는 화순 탄광 광부들의 협조로 화약과 뇌관을 확보했고, 방위산업체인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80여 대의 대형 버스와 장갑차 등을 몰고 왔다. 그리고 일부 시위대는 광주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주변 지역으로 빠져나갔다. 신군부의 탄압으로 국내 언론들이 침묵과 왜곡 보도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과 실탄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등장한 것은 이날 오후부터였다. 시민군의 구성은 학생부터 노동자, 공사장 인부, 접객업소 종업원, 날품팔이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시민군이 계엄군 임시본부가 있는 도청을 공격하자, 계엄군은 작전상 일단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했다. 계엄군은 광주에서 외곽으로 통하는 모든 교통과 통신을 차단한 채 광주를 고립시키고 봉쇄했다. 이로써 항쟁 나흘 만에 계엄군이 광주 시내를 포위하고, 교도소를 제외한 시내 전역을 시민군이 점령하였다.

22일에는 공무원, 변호사, 목사, 신부, 기업가 등 15명으로 이루어진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사태 수습 이전 군대 투입 반대, 연행자 전원 석방, 군대의 과잉 진압 시인, 사후 보복 금지, 부상자와 사망자의 치료, 보상, 요구 관철 시 무장 해제 등을 결의하고 계엄군과 교섭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구 사항에 군사 정권 퇴진이나 계엄 철폐 등이 포함되지 않아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한 데다 계엄군도 이를 거부해 무기만 절반 정도 반납한 채 교섭은 흐지부지되었다.

이에 23일에는 천주교 광주교구 대주교 윤공희를 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측에서 10명, 학생대표 20명이 각각 참여했다. 일부 수습위원은 무기 200점을 계엄군에 반납하고 연행된 시민 33명을 넘겨받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신임 국무총리 박충훈이 광주를 시찰하고 질서 회복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24일 주남 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가던 양민 18명이 공수부대에게 학살되는 등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살상이 계속되었다. 항쟁 엿새째인 24일을 전후해 시민들은 무장 해제 문제를 놓고 투항파와 투쟁파로 나뉘었다.

투항파는 무장을 해제하고 지역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계엄군과 협상을 추진하자고 주장했지만, 투쟁파는 이를 반대했다. 격론 끝에 투쟁파가 주도권을 잡았고, 25일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에서 김종배를 위원장으로 한 새로운 집행부가 꾸려졌다. 시민군은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반민주 세력과 싸울 것’을 결의했다.

당시 집행부는 계엄군의 진압에 대비하는 한편, 미국의 압력이나 범국민적 저항으로 신군부의 집권 기도가 좌절되기를 바라며 시간을 벌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22일에 광주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신군부가 요청한 4개 대대의 한국군을 미국의 통제에서 풀어달라는 안에 동의한 상태였다. 미군은 앞서 5월 초 질서 유지에 필요하다면 시위자들에 대한 무력 사용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한국 정부에 전달한 바 있었다.

26일 오후 6시 계엄군은 시민군에게 무조건 투항할 것을 최후 통첩했다.

27일 새벽에 계엄군은 전투사단과 공수여단 병력 2만 5,000명을 동원해 시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이른바 ‘충정 작전’에 돌입했다. 계엄군의 일방적인 공세로 도청에 있던 시민군들은 대부분 사살되거나 부상을 입었고, 일부 생존자는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전일빌딩에 있던 시민군 20여 명은 총격전 끝에 전원 사살되었다.

광주민중항쟁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계엄사령부는 6월 5일 민간인 148명이 사망했고, 이 가운데 118명이 총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발표했다. 사망한 군인은 15명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1990년 제정된 광주 민주화 운동 보상법에 따라 피해자로 인정된 민간인은 사망 154명, 행방불명 70명, 상이 3,193명, 기타 1,589명으로 모두 5,000명이나 되었다.

민주민주화대성회

 

광주민중항쟁은 신군부의 집권 계획에 따른 과잉 진압, 유신독재를 관통하며 이어져 온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목적에 따른 영호남 지역감정 조장 등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1980년대 학생운동에서는 서울과 광주, 부산 등지의 미국 문화원에 대한 점거 및 방화가 특징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미국이 신군부의 진압군 동원을 승인한 것과 관련해 반미 운동이 확산된 데 따른 것이다.

늦게나마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 또는 광주사태로 불렸던 5.18은 1988년 노태우 정부 출범 직후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되었다.

그리고 1988년 11월 사건 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었으며 1997년 5월 18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당시 신군부 세력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는 1995년에 구속되었으나 1997년 사면되었고 1998년에 복권되었다.

5.18민중항쟁과 남평 사람들

당시 광주는 전남도에 속한 행정구역으로 전라남도 광주시였고, 바로 인접 지역이 나주시 남평읍이었다. 드들강을 끼고 농로 사이로 경계를 이루었던 남평은 광주 영역의 생활권이었다. 그러다 보니 남평사람들은 남평 양동시장, 남광주 시장에서 장사를 했고, 남평사람들은 광주로 진학하였다.

5.18민중항쟁 당시 남평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항쟁에 참여할 수 밖에 지리적 여건과 경제활동의 영역이었다. 시민군들이 들었던 카빈총과 M1, 탄알 박스를 남평지서의 무기고에서 확보되었다. (<당신이 잠든 곳에 우리 마음 함께 있네>의 최인영 증언)

5.18민중항쟁과 관련한 남평의 유공자들을 알아보자.

남평의 5.18관련 유공자는 2011년 6월 현재 당시 사망자 1명, 부상 후 사망 1명, 부상 후 현재 생존 유공자 10명 등 총 12명으로 파악되었다.(2011년 기록)

5.18희생자 송정교
5.18희생자 송정교
희생자 송정교 소개(5.18기념재단 누리집)

 

 

5.18 당시 사망자는 송정교이다. 송정교는 남평읍 우산리 차산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영암군 시종초등학교 교감으로 재직 중이던 1980년 5월 24일 당시 광주에 있던 자녀를 나주집으로 데려가려다가 송암동에서 군인들의 총격을 받고 헬기에 실려가 그날 오후 8시 8시 40분에 군통합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송정교는 현재 ‘국립5.18민주묘지’의 2-19 묘지에 잠들어 있다. 그의 묘비에는 “신평송씨 18대손 3대 독자로 태어나 교사로서 짧은 삶을 마감하다. 고인과 후손은 바라노라. 이 땅에 이 비극이 다시 없기를”이라고 새겨져 있다.

또한 5.18과 관련하여 당시 부상을 입었던 박건용은 1945년 동사리에서 출생하였다. 5.18딩사 부상을 입었다가 1988년 3월 14일 사망하였다. 그리고 1998년 4월 28일 국립5.18묘지의 3-42에 이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5월의 민주화 투쟁은 국민적 저항이요, 항거였고, 당신은 민주화 투쟁을 위해 목숨을 잃었고, 위대하였고, 후세는 넋의 정신 이어받아 민주평화 이루리라”라 새겨져 있다.

당시 가장 가슴 아픈 상처는 남평에 살면서 광주로 통학을 하던 광주 K여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유정애(18세, 가명)가 계엄군에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다. 1980년 5월 19일 서둘러 귀가를 하던 중 계엄군의 진압봉을 맞고 머리채를 잡혀 강제로 군용차로 실려 갔다가 계엄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이후 유정애는 정신질환으로 국립나주정신병원에 입원 치료를 했고, 자원사 절에서 정양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정신과를 다니면서 치료를 받으며 피폐한 삶을 살고 있다.(<부서진 풍경> ‘찢어진 5월의 치마폭)

그리고 남평 5.18유공자로 신경진(1955년생), 손갑술(1955년생), 장양오(1956년생), 문병호(1957년생), 박인천(1962), 김용관(1955년생), 김시도(1956년생), 박창현(1957년생), 김창현(1961년생), 박정한 등으로 파악되었다.

5.18민중항쟁은 44주년이 되어가고 있다. 사실 5.18민중항쟁은 필자와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광주 광천동 S고를 다니고 있다가 자연스럽게 민중항쟁에 휘말려 들어갔다. “김대중을 석방하라, 계엄령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함께 했다. 그리고 수많은 죽음과 시체를 목격하고 절망과 분노를 느꼈다. 아프고 참담했다. 있을 수 없는 죽음과 어둠의 시대였다.

다행히 군사 정권을 반대하면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던 광주시민들의 투쟁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진상 규명, 학살자 처벌, 명예 회복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5.18유공자들의 정상적인 재평가와 기록 또한 중요하다.

역사 퇴행의 시대, 죽음으로 지켰던 민주화, 그리고 인권, 평화, 공동체의 정신을 왜곡하고 부정하고 더 나아가 혐오하는 자들의 움직임이 간단치 않다.

5월 영령과 유공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고 단결하고 협력하여 바른 역사를 지키는 일에 심혈을 다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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