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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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24
  • 영산강닷컴 정문찬기자
  • 승인 2024.02.26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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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과 남평의 학생독립운동가들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1929년에 전라남도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항일 투쟁 운동으로 나주에서 기차 통학을 하던 한일 중학생 사이의 싸움이 도화선이 되어 광주의 학생들이 궐기하여 항일 투쟁을 광주학생항일운동이라 한다. 일제강점기의 3대 항일독립운동으로 불리운다.

학생독립운동의 시발지 나주역사
학생독립운동의 시발지 나주역사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전개와 의의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일어난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 학생들의 충돌이 계기가 되었다. 광주중학 3학년인 후쿠다 슈조 등의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3학년인 박기옥 등을 희롱하였고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 등과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광주고보와 광주중학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확산되었고, 일본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고 조선인 학생들을 구타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광주고보 학생들은 11월 3일 광주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11월 3일(음력 10월 3일)은 일왕 메이지의 생일인 명치절이어서 학생들은 이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그리고 광주에서는 전남 누에고치 6백만 석 돌파 축하회가 열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명치절 행사를 마친 광주고보 학생들은 광주 시내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일부 학생은 나주 사건에 대해 편파 보도를 했던 광주일보사로 몰려가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기도 했다. 그리고 신사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던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들과 집단으로 충돌하여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날의 시위는 비교적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었으며, 여기에는 광주고보만이 아니라 광주여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도 일부 참여했다. 일제는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광주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시위에 참여한 조선인 학생 수십 명을 구금하였다.

광주 학생들의 항일독립투쟁은 어떤 특정 지역 학생이나 주민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 학생과 전 민족의 당면 과제였다. 따라서 학생이 항쟁 주체였으나 민족 각 계층의 성원과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광주 학생의 항일 의지는 목포·나주·함평 등으로 번졌고 드디어 서울 학생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이후 전국으로 확대되어 전국의 학생은 최악의 조건들을 뚫고 지성의 결의와 행동력을 발휘함으로써 항일 학생운동 사상 불멸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먼저 목포상업학교에서는 11월 3일 광주 학생 항쟁의 소식을 전해들은 최창호·강영수 등 몇 사람이 주동이 되어 광주 학생과 연락 끝에 11월 19일 '피감금 학생 즉시 탈환', '총독 폭압정치 절대 반대' 라는 기치 아래 시위를 전개하다 36명이 검속되었고 72명이 무기정학과 근신 등의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27일에는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에서도 독자적으로 항일 시위가 있었다.

이처럼 광주 학생의 항일운동은 목포·나주를 비롯하여 곧 서울로 점화되었으며, 이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에는 신간회의 영향이 컸는데, 중앙 본부의 간부이며 변호사인 김병로와 허헌, 서기장 황상규 등이 광주학생항쟁운동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광주에 다녀와서 진상을 보고하자, 한용운·조병옥 등이 중심이 되어 민중운동을 준비하였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전남 나주시 죽림길)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전남 나주시 죽림길)

 

그러나 12월 9일 서울 학생들의 궐기로 12월 13일 예정했던 신간회의 민중운동은 경찰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신간회와 청년단체·학생단체에서 광주 사태에 대하여 '진상 조사'라는 명목으로 적극적인 개입과 지원 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은 학생들의 대일 항쟁의 분위기가 성숙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29년 12월 2일 밤과 3일 새벽 사이에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주요 공립·사립학교와 시내 요소에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화를 위해 학생과 민중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렬한 격문이 살포되었다.

경찰은 종로경찰서에 수사 총본부를 설치하고 4일 정오까지 각 사상단체·청년단체·근우회의 간부와 학생 등 127명을 검거하고 조사에 나섰다. 5일 아침에도 40여명을 더 검거하였다.

그리고 12월 5일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서는 '학우회의 자치', '조선 역사의 교수', '광주 학생에 대한 응원', '식민지 교육 반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고 교내 시위에 들어갔으며, 7일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가 교내 시위를 했다.

그 뒤 같은 취지로 경신·중동·보성·중앙·휘문·협성실업·숙명·근화·배재학교 등이, 11일에는 이화·여자상업·동덕·실천여학교·경성농업학교·법정학교·고등예비학교·전기학교·선린상업학교 한국인 학생 등이 광주 학생 지원을 위해 분기하자, 배화·진명·중앙보육·정신·간이상공 등의 각 학교는 휴학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1930년 1월 개학하자 항일 운동은 다시 시동되었다. 1월 15일 보성전문학교를 비롯한 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등 서울 학생들은 광주학생 지원과 일제의 살인 정책을 규탄하고 성토·시위·동맹휴교 등을 단행하였다.

서울 학생의 항일 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참가한 학교 194개, 학생 수 5만 4,000여 명이었으며, 퇴학 처분자 582명, 무기정학 2,330명, 피검자 1,642명으로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대일민족항쟁이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현 광주교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현 광주교대)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 광주 학생들은 당시 사회운동·청년운동을 포함한 민족 독립운동에 대해서 민감한 수용력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체득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우리 민족사가 일제의 강점으로 식민지화되어 있을 때 민족 독립을 위한 역사적 과제를 모색하는 생동력 있는 지성을 추구해 나갔다.

둘째, 광주 지역에는 이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성진회가 창립되어 민족 독립의 성취를 위한 이론을 다양하게 연구하여 대일항쟁 요원을 육성, 조직한 점이다.

셋째, 일제 강점기의 한국 사회에서 누구든지 민족적 방향, 그리고 인간적 차원에 선 대일 감정이 있었다. 아무리 소박한 측면에서라도 일제는 침탈자요 수탈자이며, 폭력을 동원하는 압박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반일선상의 상식을 조직성과 집단력이 강한 학생층이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구체적으로 비판하고자 하였는데, 민족 차별과 식민지 교육 체제, 여기에 대한 '민족 독립의 필요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처럼 광주학생독립운동은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타도를 통한 민족의 독립과 이 길을 위해 식민지 교육 체제를 반대하고, 민족 교육을 주창하며 궐기한 민족독립항쟁인 것이다.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남평의 학생들은 어떠하였을까.

남평에서는 윤승현, 강유진, 송성수, 강달모 등이 학생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지난 번에 윤승현은 이미 소개를 하였다. 이번에는 남평 출신의 강유진, 송성수, 강달모를 소개한다.

# 강유진(1910~1950)

강유진은 1910년 2월 20일 남평면 동사리 197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29년 3월 광주사범학교 3학년 때 비밀독서회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강제 퇴학을 당하였다.

그 후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였다가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서훈하였다.

 

 

애국지사 송성수((1905~1972))
애국지사 송성수((1905~1972))

 

 

 

송성수 판결문
송성수 판결문

 

 

 

 

 

# 송성수(1905~1972)

송성수는 1905년 11월 13일 남평면 우산리 897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29년 6월 29일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일인교사를 배척하였다는 이유로 실형을 받았다. 그 뒤 1931년 농민운동을 하다가 2년여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독립훈장 애족장을 서훈하였다.

# 강달모(1909~1975)

강달모는 1909년 4월 4일 남평면 동사리 197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학생결사 독서회를 조직하고 10개월을 주도적으로 활동을 하였다.

광주사범학교 재학 중인 1927년 4월 식민지 노예 교육을 강요하던 일본인 교사 강전을 다른 학교로 전출시키는 데 앞장섰다.

비밀결사 성진회를 이끌었던 장재성이 일본 도쿄 주오대학을 중퇴하고 1929년 6월 귀향하여 김기권의 집에서 회합할 때 전남사범학교 송동식, 광주고등보통학교 김기권, 김보섭, 김상환, 윤창하, 그리고 광주농업학교의 김순복, 조길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때“조직적인 단결을 통한 사회주의의 연구와 실행”을 위해 독서회 중앙본부를 결성하였다. 윤창하 등과 함께 재정부 위원에 선임되어 학생운동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7월 전남사범학교의 강문범, 김재용, 박노기 등과 함께 수피아여학교 뒷산에서 장재성을 만나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학생들을 5개 반으로 나누어 사회과학을 연구하였으며, 임종근으로부터 주의 선전 인쇄물을 받아 학생들에게 배포하는 등 항일 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9월 학생운동 운영자금 조달을 위해 사범학교의 송동식, 광주고보의 김보섭, 윤창하, 농업학교의 김순복, 조길룡 등과 같이 장석천, 나승규의 지도를 받으며 북성정에 ‘김기권문구점’으로 위장한 소비조합을 설립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전남사범학교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검거되고 1930년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개월 형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받아 옥고를 겪고 1932년 6월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역사를 잃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최근에는 다시 역사전쟁이 일고 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암담하고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의 치욕과 불행을 기억하고 다시는 굴욕적이고 참담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제대로 역사를 배워야 한다.

그런데 친일 정권이 들어서면서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부정하는 역사교육의 퇴행을 꾀하고 있다.

국난 앞에 용기있게 나섰던 학생들의 피나는 노력과 죽음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학생항일운동이 부정되고 있다. 간악한 식민정치를 거부하고 민족교육을 외치고, 자주와 독립을 외치다가 산화해 간 많고 많은 학생 독립운동가에게 부끄럽고 죄송하다.

민족정기와 역사정의를 부정하는 친일 세력들이 다시 등장하여 역사를 퇴행하는 일에 맞서 자주독립의 정신을 되살리고 저항해야 한다. 민족 차별과 식민 교육을 강요했던 일제강점기의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할 수 없다.

더 안타까운 토착왜구로 불리는 친일세력들은 스스로 민족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부정하며 여러 곳곳에서 역사왜곡과 역사 부정을 하고 있다. 참으로 개탄스럽고 통탄스러운 일이다.

과거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다시 민족정기와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주적이며 주체적인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역사교육과 환경을 만들어가는 데 매진할 때이다.

깨어있는 애국시민들의 저항과 실천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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