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23
상태바
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23
  • 영산강닷컴 정문찬기자
  • 승인 2024.02.11 23: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1운동과 남평 출신 원창권 애국지사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지금부터 105년 전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여 서울의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들의 독립 선언 시작으로 학생들과 시민들이 탑골 공원에 모여 독립 만세 시위를 했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일제의 무단통치를 종결시켰고, 나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민족해방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족해방운동으로 부르고.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한다. 일부에서는 더 나아가 3.1혁명운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3.1만세운동(1919.3)
3.1만세운동(1919.3)

 

3.1운동 전개와 결과

3.1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일어난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이다.

이 운동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면, 민족자결주의가 대두하자 이를 민족해방의 기회로 살리고자 하는 노력은 국외에서 먼저 나타났다.

1918년 11월 여운형·김규식·장덕수 등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중국에 온 미국 특사에게 전하고, 1919년 1월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고 국내외 민족운동가들과 독립운동 방법을 협의했다.

1918년 12월 미국지역의 대한인국민회 총회는 이승만 등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했으나, 미국 당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미국 대통령에게 3개항 청원서를 제출했다.

도쿄에서는 1919년 2월 조선인유학생학우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독립청원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소집 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때의 독립선언서를 2.8독립선언이라고 한다.

이러한 해외의 움직임을 알게 된 손병희·최린 등 천도교측 인사들과 이승훈 등 평안도의 기독교계 인사들이 국내에서의 독립선언을 계획했다.

여기에 불교계의 한용운 등이 참여하여, 천도교·기독교·불교 3개 교단이 국내 독립선언의 주축이 되었다.

이들이 준비한 운동계획은 독립선언과 일본에 대한 독립청원을 병행하고,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원칙에 따라 운동을 진행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선언서, 파리 강화회의 등에 보내는 독립청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독립의견서 등이 작성되었다. 그리고 2월 27일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종교 교단을 중심으로 미리 배포되었다.

그후 고종의 장례일인 3월 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전국적인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한 종교계의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의 취지를 밝힌 다음 바로 일제 경찰에 자수했다.

원래 33인은 독립선언식을 종로의 탑골공원에서 거행하기로 학생들과 합의했었다. 그러나 33인은 공원에 모인 학생·시민 들이 전면적인 시위에 들어가 그들이 세운 비폭력 원칙을 깨뜨릴 경우, 일본·미국 등 열강의 호의를 얻어내지 못할까 우려하여 장소를 바꾸었던 것이다. 결국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군중은 독립만세의 함성을 외치며 시위대열을 이루었다.

독립선언식은 대중의 반일감정이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하는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3월 1일 시위운동의 후속 조치로 3월 5일 서울역 광장에서 다시 모여 시위를 했다. 3월 상순 이후 주로 대도시에서 전개되던 만세시위는 각 지방의 중소도시와 농촌으로 확산되었다. 운동은 5월까지 지속되었고,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 사이에는 동시다발적이고 격렬한 투쟁양상을 보여 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운동이 급속히 확산되는 데는 지식인·청년·학생층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서울 등 도시지역에서 유포된 선언서, 각종 유인물과 시위 경험을 각 지역에 전파하는 데 앞장섰을 뿐 아니라 각종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시위를 준비하고 이끌었다.

서울에서는 3월 22일 노동자대회가 열렸으며 전차종업원, 경성 철도노동자 등은 파업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항의했다. 서울·평양·선천 등지에서는 상인들이 철시 투쟁을 벌였다.

농촌에서는 횃불 시위와 산 위에서의 봉화 시위가 벌어졌고, 이 마을 저 마을로 시위를 확산되었다.

3월 1일 이후 전국의 시위운동 상황은 일본측 발표 자료에 의하면, 집회 횟수 1,542회, 참가인원 202만 3,089명, 사망자 수 7,509명, 부상자 수 1만 5,961명, 피검자 수 5만 2,770명, 불탄 건물은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다.

국내에서의 시위운동은 간도·연해주·미국 등지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국외 시위가 일어났다. 북간도에서는 3월 13일 용정에서의 독립선언식이 최초였으며, 서간도에서는 3월 12일 유가현 삼원보에서의 독립선언 경축대회로부터 시위운동이 촉발되었다.

연해주에서는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 주최로 독립선언과 시위가 시작되었다. 미국에서는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등지에서 주로 모금활동을 통해 임시정부의 재정이나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선전활동을 지원했다.

3.1운동은 극소수 친일파·친일지주·예속자본가를 제외한 전민족적 항일독립운동이자 계몽운동, 의병운동, 민중의 생존권 수호투쟁 등 각계각층의 다양한 운동 경험이 하나로 수렴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거족적 민족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결과 일제의 무단통치가 끝나게 되어 민족해방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운동이념은 복벽주의가 청산되었고 민주공화제 이념이 전면적으로 보급되었다.

그 결과 공화제 형태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될 수 있었다. 또한 이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 식민지에서는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의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으로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중국 등 아시아 민족의 해방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3.1운동은 일차적으로는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인하여 독립쟁취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결국 전국적으로 운동을 지도할 조직이 없었다는 점, 이 운동을 처음 준비했던 33인이 일본·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가 독립을 선사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 타협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민중의 투쟁을 끝까지 이끌어가지 못했던 점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된 내적 원인이었다. 운동 과정에서 드러난 이러한 한계는 이후 민족해방운동에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3·1운동의 과정에서 끝까지 비타협적인 투쟁의 모습을 보여준 민중이 주체가 되지 않으면 민족이 해방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민중의 민족적·계급적 각성도 촉진되었다.

나아가 민중의 힘을 결집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독립운동과 그 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점차 공감을 얻어갔던 것이다.

나주의 3.1운동(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나주의 3.1운동(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전남광주의 3.1운동과 남평의 원창권 애국지사

전남 광주지방에서 근대성에 입각한 새 풍조가 일기 시작한 것은 교회(1903년, 금동교회의 설립), 학교(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병원(제중의원) 등이 설립되므로써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리하여 광주는 호남의 교육·문화 도시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 지방에서 최초로 3.1운동의 동기가 형성되는 것은 동경의 2.8운동에 참여했던 광주 출신의 정광호·최원순 등이 광주로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2·8독립선언문을 우송해 줄 때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에 자극된 이 지방의 청년 최한영·김복수 등은 광주에서도 독립운동을 펴기로 작정하였다.

숭일학교 학생 동원문제는 최병준이 교섭하였고 이들 학생들의 힘으로 독립선언서, 기타 인쇄물을 배포하도록 하였다.

김강은 수피아여학교 교사인 박애순을 만나 학생의 참가와 선언서의 배포를 교섭하고 3월 9일에 다시 만나 3월 10일 3시반에 거사한다는 연락을 취했다.

박애순은 학생들에게 <매일신보>의 기사를 읽어주고 “만국 강화 회의에서 조선도 독립을 승인 받았기 때문에 각처에서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이므로 우리도 그 운동을 개시하고 조선독립만세를 불러야 한다는 설득을 폈다.

최병준은 학생들에게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희생하여 계급제도를 타파하고 자유를 위해 애쓰셨다. 기독교도인 우리는 어떠한 장애라도 배제하고 그 목적의 수행을 위하여 노력을 해야한다”는 설교를 했다. 또한 송흥진 등은 숭일학교 학생들에게 만세시위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한편 최영균은 3월 9일 광주농업학교 기숙사를 방문하여 농업학교 학생의 참가를 권유하였다. 이리하여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 아래의 작은 장터에는 약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양림동 방면에서는 기독교인,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광주천을 따라 내려왔고, 서문거리로 많은 시민들이 몰려오고 농업학교 학생들과 군중은 북문 방면서 모여들었다. 또 지산면 쪽에서는 수백명의 농민이 달려왔다.

광주의 만세시위는 3월 10일 끝난 것이 아니고 다음날 오후 5시에 숭일학교·농업학교 생이 중심이 된 약 3백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렸고, 13일 장날에는 또 1천여명이 만세를 부르고 일부는 시위를 감행하였다.

4월 8일에는 광주 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하여 만세시위가 시도되었으나 사전 정보가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참여했던 교사들과 학생들이 퇴학을 당하고 구속되었다.

애국지사 원창권
애국지사 원창권

 

한편 3.1운동과 관련하여 남평 출신 원창권이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1897년 12월 2일 남평면 노동리 105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39년 3월 10일 광주숭일학교 재학 중에 광주시장에서 김복현, 김강 등의 주도 아래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고, 광주시내에서 독립선언서, 경고문 등을 배포하며 활동하다 검거되었다. 일제로부터 징역 6월을 받았다.

정부는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서훈하였다.

모름지기 국민이라면 3.1운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중, 고등학교 교과서와 많은 관련 책과 자료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해마다 3.1운동 정신을 기리는 행사를 하고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정부와 지자체, 학교에서 3.1행사를 할 것이다. 당연지사 꼭 그래야 할 일다.

다만 아쉬운 것은 3.1운동 열사들 중에서도 유명한 사람만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만명의 피해자들이 있다. 다행히 독립투사, 애국지사로 서훈받고 국립묘지에 묻힌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이름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마찬가지로 우리 남평 출신으로 3.1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만세시위 운동을 부르다가 검거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가 있다. 바로 원창권 유공자이다. 다가오는 3.1절에 꼭 기억하고 추모했으면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