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22
상태바
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22
  • 영산강닷컴
  • 승인 2024.02.05 06: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견리사의 견위수명, 한말 남평의병 활동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한말의병은 전라도가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제 측 자료에 따르면 1908년 전라도의병들은 일본 군경과 교전 횟수와 교전의병수에서 전국의 25%와 24.7%였고, 1909년에는 47.2%와 60%을 차지하였다.

이처럼 남도의병은 타지역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크게 활약했음을 보여준다. 남도의병들은 삼남지방을 누비며 일본 군인과 교전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친일세력인 일진회와 밀정 등을 처단하는 반일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에 일제는 1908년 이후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하여 남도의병 탄압에 나섰다. 일명하여 ‘남한대토벌작전’이 그것이다. 그들은 의병들을 폭도라고 불렀다.

그래 남한폭도토벌 대작전이라고 했다. 일제의 추산에 의하면 ‘남한 대토벌 작전’ 직전 호남지역의 의병은 의병장 약 50명을 포함하여 약 4,000여 명에 달했다.

이처럼 호남지역에서 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본거지로서 반일 의식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1904년 러일전쟁을 전후로 하여 일본인에 의한 토지 침탈, 경제적 수탈이 극심하여 반일의식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는 호남지역의 의병을 완전히 진압하지 않고서는 의병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지역에 대규모 군사 작전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도의병은 일시 기세가 꺾였으나 항쟁을 멈추지 않았다. 남도의병은 어느 한 지방을 습격하려고 할 때 합진과 분진 형태의 전술을 사용하였다.

소위 유격 전술로서 게릴라 작전이었다. 몇 사람씩 분산하여 양민으로 가장하여 군청 소재지와 일제 순경과 친일 인물의 동정을 정찰하고 기회를 잡아 처단하고 재빠르게 이동하는 신출귀몰한 작전을 하여 일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의병은 활동 지역 근처 민간인들의 후원을 필수적으로 하는 게릴라 세력이었으므로, 호남 일대 민간인들에 대한 탄압도 이 과정에서 뒤따랐다. 의병을 후원해 주는 것으로 의심되는 마을을 포위하고, 호적 또는 명부나 민적 등에 기록된 남자를 일일이 대조하면서 무언가 의심스러운 점이 나타나면 추궁하였으며, 의병을 숨겨주고 식량을 제공했다는 증거가 잡히면 해당 마을을 초토화 시켰다.

이 때문에 호남의 민간인들은 일본군에게 보복 당할까봐 의병을 숨겨주거나 지원해 주는 것을 기피 하였고, 의병들은 민간인들에게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한 번 수색한 마을을 불시에 다시 수색하면서 일본군의 단속을 피해 숨었다가 안심하고 다시 나타난 의병을 사살하고 체포하는 치밀함까지 보여주었다. 이러한 일제의 군사적 압박에 의병들은 전면전을 회피하고 은신처를 자주 옮기거나, 부대를 나눠 각개적으로 일본군의 봉쇄선을 뚫으려고 시도하면서 전력 보존을 위해 노력했지만 일본 군경이 친일 밀정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예상 이동로에 매복까지 하면서 철저하게 때려잡는 바람에 큰 소득은 없었다.

남도의병들은 1908년부터 1909년까지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나 토벌작전은 결과는 참담했다. 일제가 공식적으로 작성한 1909년 10월 27일자 통감부 보고서를 보면 일본군 사망자는 불과 육군 병사 8명이다.(계급별로 상등병 1명, 일등졸 5명, 이등졸 2명). 그런데 붙잡은 의병이 1,100여명, 항복한 수는 7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경찰의 보고에 의하면 이 기간 동안 희생된 의병장만도 103명이다.

특히 뼈 아팠던 것은 심남일, 안규홍, 전해산 등 지방 사족 출신이 다수였던 주요 의병장들이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처형된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한 남한대토벌작전 전체 기간 중 양측의 피해 규모를 살펴보면, 토벌대측은 사망자가 136명, 부상자 277명이었던 반면, 의병측은 사망자가 17,779명, 부상자가 376명, 포로가 2,139명이었다.

이 작전 이후 근거지를 상실한 의병세력은 만주·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게 된다.

한편 포로로 잡힌 의병들은 '폭도'로 규정당하고 일본군에 의해 해남에서 강진, 장흥, 보성, 벌교, 순천, 광양 등을 거쳐 하동까지 도로(현재의 국도 2호선)를 개설하는 강제 노역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일제는 이 도로를 '폭도도로'라고 불렀다.

이 작전 이후에도 경상도, 황해도 등지에서는 아직 의병이 남아있었으나 일본의 토벌로 인해 그 기세는 점점 약해졌다.

결국 한국이 일본에 완전히 병합당한 이후 국내에서 근거지를 상실한 항일 전투 세력은 국경을 넘어 만주, 연해주 등으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그 명맥을 잇게 된다. 참으로 의병전쟁의 결과는 아픈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양벽정(전남 나주시 다도면)
양벽정(전남 나주시 다도면)

 

남평지역에서의 의병활동은 어떠했을까.

<비록 한말전남의병전투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남도의 심남일, 박사화, 전해산 등의 의병장 및 의병들이 남평 주둔 헌병분견소와 전투를 벌렸다. 이 자료는 일본 전남경무과의 기록이기에 의병을 ‘비도, 적단, 폭도’ 등으로, 그리고 의병장을 ‘수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당시의 기록이니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먼저 남평지역의 의병활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08년 7월: 7월에 들어서 전해산이 우리 토벌기관의 중압에 못이겨 부대를 해산하고 전북에 숨었고, 심남일은 부호가 흩어져 겨우 강무경 이하 수십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고, 박사화는 오오하라 헌병대위에게 회견을 청하고 부하의 투항 조면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1908년 7월 20일: 남평 주둔 헌병대가 나주군 남평면 암정리에서 약 50여명의 폭도와 충돌, 교전 1시간 만에 이를 격퇴했는데 5명을 죽이고 화승총 1정을 노획했다.

1908년 8월 5일: 나주군 욱곡면 집에 총을 휴바한 비도 17명이 내습하여 음식을 강요하고 돈 75원을 약탈했다.

경찰관이 급히 달려가 수사했으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1908년 10월 25일: 폭도 10여명이 남평읍 풍림리에 세금 영수원 이정고 집을 내습하여 그를 결박하여 폭행하고 70여원을 약탈했다. 이 급보를 받은 헌병 및 순사 토벌대가 급히 출동하여 수색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1909년 3월 13일: 남평분견소 헌병 2명, 보조원 3명이 광주군 대촌면 대지리에서 수괴 오성술이 이끄는 약 60여명의 폭도와 충돌하여 5명을 죽이고, 총 1과 군도 1를 노획했다.

1909년 7월 14일: 폭도 거괴 박사화 영산포 분대장 오오하라 대위에게 편지를 보내 회견을 청했다. 대위는 이를 수락하고 이날 정오 나주군 공산면의 무명촌에서 회견했다.

회견의 요지는 투항의 뜻 비치고 자기 한 몸을 버려 부하 100여명의 생명을 구하려는 것이었다.

대위는 후일에 화답할 것을 약속했으며, 박사화도 이를 수락하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대위의 노고를 위로했다.

1909년 8월 20일: 대토벌 계획에 따라 배비선에 들어있는 남평 능주 외 4군수에게 면장소집을 훈령했다.

또한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와 <독립운동사> 자료에서 남평지역의 일본 헌병대 등과 맞서 전투를 벌인 의병 기록을 볼 수 있다.

1907년 2월 1일: 의병 70여명이 전남 남평에서 일본군 남평헌병분견대와 접전하다

1908년 7월 17일: 심남일 의병부대는 남평장담원에서 격전하여 일인 5명을 사살하다

1908년 7월 20일: 의병 70여명이 남평에서 교전하다

1908년 7월 25일: 의병 100여명이 남평에서 접전하다

1909년 2월 26일: 박사화, 박민홍, 강무경 의병 250여명이 남평군 죽곡면에서 일본과 한국 순사 헌병합동대를 공격하다.

1909년 3월 13일: 의병 약 60여명이 남평 서북 10리에서 교전하다.

1909년 4월 27일: 심남일 의병부대 남평 거성에서 접전하여 일본군 약 70여명 죽이다.

1909년 9월 17일: 의병장 황견중이 전남 남평 서남 25리 봉황면에서 보병 제2연대와 교전 중 피체되다.

남평지역에서 의병활동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평 출신의 의병장들도 의병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남평 출신의 의병장들을 알아보자.

권찬식: 1869년 남평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이 안동이고 자가 우택이며 호는 월산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곳을 전전하며 공을 세우고 적에 붙잡혀 대구감옥에서 수형 중에 순절하였다.

한경환: 1869년 남평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운삼이며 호는 이은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지 권찬식과 더불어 기별할 것을 모의하고 재산을 털러 의병을 일으키려다 적에게 체포되어 순절하였다.

윤영채: 1886년 남평에서 출생하였다. 자가 효원이고 호는 설송이다. 1908년 항일 기병하여 의병 수백명을 모아 훈련하고 보성 대원사에서 크게 전공을 세우고 격정 중에 1908년에 순절하였다.

1980년 정부에서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정순일: 1869년 남평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하동이고 자는 치오이다. 1908년 기병하여 심남일 의진에서 종군하였고, 남평 장태전, 지석강전, 영암 초촌전, 장흥 유치전 등에서 적 수십명을 참살하고 능주 췌악산 전투에서 격적 중에 적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조양식: 1854년 남평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이 순창이다. 1908년 2월 심남일 의병장고 남평에서 거의하였다.

3월부터 강원 오치동, 장흥 곽암, 남평 장담원, 능주 노구두, 영상 사촌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8월 1일 나주 반치에서 적과 접전 중 1908년 순국하였다.

광복 후 전남지사가 공훈을 표창하였고, 1991년 정부에서 서훈하였다.

만호정(전남 나주시 봉황면)

 

나라의 위태로움에 목숨을 바치다

見利思義 見危授命 (견리사의 견위수명)

‘나에게 이익되는 것을 접하면 옳은지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

한말의 남도의병을 만나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2023년의 사자성어는 견리사의의 반대 의미였던‘견리망의’였다. 답답하고 안타깝다.

난망하고 음습한 시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엄정하다. 특히 한일관계는 굴욕적이고 굴종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가.

푸른 용의 승천을 기원하는 갑진년에 맞아 다시 견위수명을 다한 남도의병들, 특히 남평지역에서의 의병 활동과 의병장을 알아보았다.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거의 모르고 있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폭도라는, 수괴라는 이름으로 쫓기거나 사살되었거나 감옥에 갇혔다. 의병들이 죽음 앞에 의연하게 일어서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아는가. 진정 아는가.

의로움을 지키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온몸으로 막아내려던 의병과 의병정신을. 무심코 지나다니는 남평의 전투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은 의병장들의 이름들.

이제라도 기억하고 이어가자. 그래야 민족정기가 바로 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