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21
상태바
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21
  • 영산강닷컴 정문찬기자
  • 승인 2024.01.21 15: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의 재앙, 정묘와 병자호란의 남평의병 이야기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조선의 재앙 호란은 19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으로 청 태종이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사건을 말한다. 정묘호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침략하였으나 실제로는 명을 공격하기 전에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명하여 ‘병자전쟁’이라고도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우며 버텼으나 식량마저 끊어져 청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하는 의식을 치르며 전쟁이 끝났다. 병자호란은 비교적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항복 후 수많은 전쟁 포로가 발생하면서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받았다.

병자호란 이후 청으로부터 조선국왕으로 책봉 받아 군신관계를 재확인하는 등 조선과 청의 군신관계는 점차 강화되었고, 조선은 청의 요구에 따라 삼전도에 청 태종의 공덕과 승전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는 치욕을 당하였다. 청의 연호를 사용해야 했고, 불평등한 강화조약을 이행할 것을 여러 차례 요구받았다. 더구나 청은 조선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명을 치고자 했다.

호란은 임진전쟁의 결과보다 더 참담했다고 할 수 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할 때까지 조선과 청의 관계는 불리한 조공관계와 굴욕적인 외교관계로 이어졌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임진전쟁에 이어 정묘병자전쟁에도 의병이 일어서다

늘 그랬다. 정묘와 병자호란에도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때는 전방지역인 평안도에서 먼저 일어났다. 곧이어 후방지역인 호남지역에서도 일어났다. 그러나 의병 활동은 부진하였다. 이유야 많겠지만 임진전쟁 시기에 의병활동을 하여 군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대한 예우가 소홀하였던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곡식을 바치거나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였으나 오히려 노역이나 징병의 대상이 되었다. 더구나 두 차례의 호란에서 임금이 군신의 예를 갖추는 치욕과 전쟁의 참화 앞에서 의병이 나서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삼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백성들은 기꺼이 의병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때 남평에서도 창의하여 봉기하였다.

남평의 의병활동을 <남평읍지>의 기록을 통해 확인해 보자.

당시 위정자들은 국제 정세와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척화파와 주전파로 나누어져 분란과 혼란을 일삼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치욕적이고 참담한 역사로 오점을 남겼다. 그러나 열악하고 불리했던 민초들의 구국정신과 충절의 정신은 다시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다.

남한산성
남한산성

 

남평의병과 그 활동을 기억하다

# 김사립

아우 예립과 남한산성으로 갔으나 문이 잠겨서 들어가지 못하였다. 마침 순찰하던 순성장이 쇠줄로 끌어 올려서 아우 예립과 김성준은 나란히 성에 올라갔다. 은으로 만든 수갑을 내려서 받들었고 호종과에 등과하였다. 남평읍지 무신의적에 기록되었다.

# 김예립

남한산성으로 뒤따라가다 문이 이미 잠겨서 크게 수성장을 부를 때 마침 대장이 순찰하다가 발견하여 성으로 올랐다. 형과 같은 활동을 하였고, 호종과에 합격하였다. 남평읍지 무신의적에 기록되었다.

# 김성준

같은 마을 김사립 형제와 남한산성에 들어가 왕을 지키며 은으로 만든 수갑을 하사받아 지켰다. 정축년에 호종과에 올라 훈련봉사를 제수받았다. 사적이 호남절의록에 실렸다.

# 서진명

왕이 남한산성에 들어갔다는 걸 듣고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머금고 재산을 모으고 군대를 모아 최신헌과 국란에 달려갔다. 강화가 성사된 것을 알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사적이 창의록에 기록되었다.

# 서행

오현의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보고 재산을 모으고 의병을 모아 성을 지키고자 여산에 이르렀지만 강화가 이루어져 통곡하며 귀향하였다. 사적이 창의록에 실렸다.

# 송격

왕이 남행한 것을 듣고 의병을 일으켜 집안 자산을 전부 내놓아 쌀 50섬을 마련하고. 향청에서 수백 섬을 모아서 의병장 안방준의 의청으로 보냈다. 또한 병사를 거느리고 청주까지 이르렀으나 강화가 이루진 것을 알고 귀향하였는데, 그때 나이 60세였다.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서 가선대부에 올랐고, 사실이 절의록에 실렸다.

# 홍종운

나라를 지키기 못하고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것을 듣고 “성문을 지키는 장수가 연약해 두려워하고 겁을 먹고 물러나서 왕이 피난하게 하였으니, 수백년 배양한 은의와 충의의 공이 어디에 있는가?”하고 집안 재산을 모으고 가동과 의병을 모아 진사 홍남갑과 여산에 이르렀으나 병환이 심해져 귀향하였다. 사적이 절의록에 실렸다.

# 홍남갑

홍종운이 국란에 참전하려고 하자 “참으로 늙어서 순국을 보여주시니 대신하여 나가겠습니다”라고 하여 명을 받고 최신헌과 함께 의병과 곡식을 모아 왕을 지키기 위해 청주에 이르렀다. 강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왔다. 사적이 절의록에 실렸다.

# 홍종방

형 필선이 아버지 명을 받들어 창의하는 도중에 병이 발생하여 대신 재종숙 남갑과 최신헌, 서행과 청주에 이르렀다. 강화가 성사된 것을 듣고 깃발을 찢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사적이 절의록에 실렸다.

# 최신헌

청주에 이르러서 강화가 성사된 것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사적이 창의록에 실렸다.

# 윤검

오현이 전하는 격문을 보고 의병을 모으고 곡식을 모아 분격해서 일어났다. 길에서 강화했음을 알고 통곡하며 시를 남겼다. “동해를 따라 죽지 못하고? 차마 북쪽 연경 하늘을 일 것인가/ 갑옷 걷고 남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을 보며 눈물을 이어 흘렀네”라고 읊었다. 사적이 창의록에 실렸다.

# 윤숙

윤검과 의병을 모아 왕을 지키기 위해 청주에 이르러서 강화한 것을 듣고 통곡하였다. 윤검이 비분함을 가누지 못하고 시로 표현하자 이에 화답하였다. “해와 달이 밝은 가운데/성진(腥塵)이 창과 하늘에 가득하구나? 누가 강화를 성사했을까/ 느껴 눈물이 줄줄 흐르네”라고 하였다. 사실이 호남절의록에 실렸다.

# 유덕명

소모사 정홍명을 따라서 병사를 거느리고 청주에 이르러서 강화가 성사된 것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남평읍지 무신의적에 실렸다.

# 안홍안

왕이 가마를 타고 남행한 것을 듣고 정호민, 양우전, 윤숙과 병사와 곡식을 모아 여산에 이르렀으나 강화가 성사된 것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남평읍지 무신의적에 실렸다.

삼전도비(서울시 송파구)
삼전도비(서울시 송파구)

 

다시 기록하고 기억할 일이다

사실 조선에서 임진전쟁과 더불어 병자전쟁은 가장 참담하고 참혹했던 사건이다. 역사를 배우면서 교과서에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으니, 그 실상을 자세히 모르고 있다.

누군가는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말한다. 전쟁은 가장 반인권적이며 반평화적인 일이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다. 허나, 지난 과거를 보면 전쟁은 수 없이 일어났고, 또 전쟁이 진행 중에 있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인가.

다시 임진의병에 이어 정묘와 병자전쟁에서 구국과 충절을 다한 의병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런 불행이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앞에 제시된 의병들의 이름이 생소하고, 처음 들어본 이름들이다. 필자도 미처 몰랐던 분들이 대다수이다. 그래서 더욱 미안하고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그래서 이제라도 정묘병자전쟁의 의병들을 찾아 소개하는 것은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한 것이다.

이제 여러분이 관심을 갖고 참여할 차례이다.

아쉬운 것은 <호남절의록>, <창의록>, 그리고 <남평읍지>의 기록은 소략되어 있거나, 어려운 한자로 되어 있다.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들을 쉽게 읽을 수 있고, 접할 수 있도록 자료 정리와 개발이 필요하다.

교육 당국과 지자체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