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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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20
  • 영산강닷컴 정문찬기자
  • 승인 2024.01.14 22:2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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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문씨 탄생 설화 문바위와 남평문씨 이야기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남평의 드들강은 남에서 북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다. 드들강 솔밭을 지나 강물은 서쪽으로 흘러 금천에서 영산강에 합류를 한다. 드들강은 남평에 새로운 강변도시가 조성되어 옛 십리송의 풍경은 사라졌지만 변함없는 남평인의 삶과 정서를 대변해 주고 있다.

남평은 드들강을 가운데로 동쪽에 장자산이, 서쪽에는 월현대산이 위치하고 있다. 장자산 아래 장자못이 있고, 남평문씨의 탄생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문바위가 있다. 일명하여 문암(文巖)이라고 한다.

문바위(문암) (전남 나주시 남평읍)
문바위(문암) (전남 나주시 남평읍)

 

남평문씨는 남평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문바위는 남평문씨 시조 문다성의 탄생 설화와 관련된 바위로 경사면에 놓여 있어서 앞에서 보면 높이 6m, 폭 5m의 크기로 보이나, 뒤에서 보면 1m 정도로 보인다.

조선 영조 21년(1731)에 쓰인 남평문씨 창간보『신해보』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호남읍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적혀 있다.
“당시 이곳 현감을 지내던 자가 장자연못의 바위 위에서 울고 있는 아기를 거두어 기르게 되었다. 글에 능하다 하여 성을‘문(文)’으로 짓고, 사물의 이치를 잘 깨닫는다 하여‘다성(多成)’이라 이름 였다. 아기가 있던 바위를‘문암’이라 하고 이 아기를 문씨의 시조로 삼았다.”

남평 동쪽에 장자못이라는 큰 연못이 있고, 그 연못에는 높은 바위가 솟아있다. 어느날 남평마을 원님이 아침에 일어나 문바위 쪽을 바라보니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아 그곳을 찾아갔다. 장자못 위에 솟아난 바위 위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나서 바위 위로 올라가 보니 돌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돌 상자 속에는 옥같이 흰 피부의 아기가 들어 있고, 그 아기의 배와 등에는 ‘文’자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원님은 이 아기가 자라면 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데려다 길렀다. 아기가 다섯 살이 되자 글에 담긴 사상을 저절로 통달하고, 무예가 뛰어날 뿐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 총기가 있었다. 아기를 데려온 원님은 아기의 배와 등에 새겨진 문신인‘문’을 따서 아기의 성을 문씨로 하고 글과 무술이 뛰어나다 하여 다성이라 했다.

문다성은 500년(지증왕 1)에 중시아랑이 되고, 540년(진흥왕 1)에 대국사, 577년(진지왕 2)에 대아랑 대국사가 되었다.

이처럼 전설이 비록 신화처럼 신성하지는 않지만, 구체적으로 제한된 시간, 장소 및 특정한 증거물을 내세우고 있어 진실성이 뒷받침된 대표적인 씨족설화라 할 수 있다.

1851년에 문악연이 높이 1m의 비석에 ‘문암’이라 새겨 문바위 위에 세운 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1928년에 문락홍이 문바위를 둘러싸고 암각을 지었는데, 1975에 문선명이 옛 암각을 헐고 새로 지은 뒤‘문암각’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문바위에서 200m 떨어진 곳에 문다성과 문극겸에게 제사를 지내는‘상덕사’가 있다.

남평문씨 문다성 제단
남평문씨 문다성 제단

 

남평문씨 인물 이야기

남평문씨 시조는 신라 말 현재의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에서 태어나 고려 건국에 기여한 건국공신 문다성이다.

남평백에 봉해진 문다성의 묘는 실전(失傳)되었고, 문다성의 아들 문탁 이후는 소실되었다. 남평 문씨는 고려 문종 황제 때 과거에 급제하고 참지정사(종2품) 벼슬을 한 문익을 1세로 하여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남평문씨의 시조 문다성은 고려 건국의 개국공신이지만, 명실공히 고려의 명문 집안으로 다져진 것은 중시조인 문익이다.

중시조 문익의 네 아들 중 출가하여 조계종 대선사가 된 셋째 아들 문 가관을 제외하고, 첫째 문공인, 둘째 문공원, 넷째 문공유은 모두 재상을 역임하였다. 문익부터 증손자까지 종3품 이상 2명과 종2품 이상 6명이 배출되면서 명문거족으로 자리 잡았다. 문익의 손자가 무신이 난 때 문신들을 구하고 문무를 겸직했던 문극겸이다.

문극겸은 고려 후기 무신정권 초기인 명종 대에 용호군대장군, 중서시랑평장사, 태자소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문극겸은 의종 대에 직언을 하여 좌천을 당하기도 하였던 인물이지만, 정중부에서 이의민에 이르는 무신정권하에서도 참지정사, 판호부사, 판병부사 등 고위직을 유지한 문반 관인이다. 문반 재상으로서 대장군, 상장군의 무반직을 겸직하였던 첫 사례가 되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국왕에게 충언을 불사하는 충신으로 면모와 더불어 무신 권력자와 혼인의 인연을 맺으면서 무신정권하에서 정치적으로 영달한 인물이라는 측면을 함께 보여 준다.

문익점은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순유박사를 거쳐 1363년에 좌정언으로 계품사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다. 이때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의 아들인 덕흥군을 왕으로 세워 고려로 진군하게 하자 이를 지지했는데, 덕흥군이 패했다.

문익점은 귀국했다가 그 혐의로 파직되었다. 귀국할 때 금수품이던 목화씨를 몰래 가지고 들어와 진주에서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3년 만에 목화재배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목화에서 씨를 제거하고 실을 뽑을 줄 몰랐으나, 정천익이 호승·홍원에게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 이를 보급시켰다. 목화가 널리 전해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의복 재료가 종래의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목면을 보급한 공으로 1375년(우왕 1) 전의주부에 임명되었으며, 1389년(창왕 1) 좌간의대부를 지냈다.

그러나 전제개혁 문제를 둘러싸고 이성계파와 이색·우현보 등의 의견이 갈라졌는데, 이색 등과 함께 사전 혁파를 반대하다가 조준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조선 태종 때 그의 공을 기려 참지의정부사·예문관제학·동지춘추관사·강성군을 추증하고, 두 아들을 사헌부감찰로 발탁했다. 1440년(세종 22)에는 영의정과 부민후를 추증했고 충선공이라 시호를 내렸다.

장연서원(전남 나주시 남평읍)
장연서원(전남 나주시 남평읍)

 

남평문씨 제향 장연서원

장연서원은 남평문씨 시조인 무성공 문다성을 비롯함 문공유, 문극겸, 문유필, 문익점 등 다섯 분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이 서원 건립의 유서가 마련된 것은 1734년(영조 10) 세워졌던 장연사이다. 이곳 장연서원이 자리한 풍림리는 장자지가 있던 곳으로 시조인 문다성의 탄생 설화가 구전되는 곳이다.
이 장연서원의 창건에 대해 문중사람들은 1734년(영조 10)이라 말하나 실제로는 구전보다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 즉 ≪장연서원지≫ 내용 가운데 <영묘 49년 임진사실추록>조에 의하면 그 사실이 쉽게 확인된다.

1772년(영조 48)에 장흥, 능주, 영암, 보성, 광주 등 남평문씨 후손들이 순찰사에게 올린 상서에는 문다성을 건사치제(建祠致祭)함이 후손들의 당연한 도리이나 뜻만 있지 실행에 옮기지 못한지 오래되어 있었다. 또한 이보다 앞선 1770년(영조 46)에 만들어진 성균관의 통문과 관의 제사에도 그 아쉬움이 천명되어 있고 각 읍의 자손들이 남평 운흥사에 모여 건사의 통문을 올린 것도 이때였다.
결국 1772년(영조 48)에 올린 상서에 대해 순찰사는 협조와 지원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우는 1772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8세기 후반에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1871년(고종 8)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된 뒤 1923년부터 전반적으로 다시 세워지기 시작하여 규모를 일신하였고, 1975년 대대적인 중개수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벽화 문익점 이야기
마을 벽화 문익점 이야기

 

드들강은 흐르고 역사는 이어진다.

현대사회는 건설과 토목사업이 숨가쁘게 진행되고, 자연의 원형이 거의 사라질정도로 바뀌는 세상이다. 도로가 개설되고, 강과 하천은 제방이 들어서고 직강이 되어 산을 따라 흘러가던 물줄기는 인위적으로 많이 변해 버렸다. 드들강도 예외는 아니다.

상선약수. 흐르는 물처럼 세상의 변화를 막을 수는 없다. 당연한 것이고, 또 시대의 흐름과 발전에 따라 적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역사는 이어진다. 유서 깊고 내력 있는 고장의 역사와 문화는 예외 없이 시대에 맞게 변화하고 적응하면 이어진다. 남평 문바위 설화는 그래서 소중하다. 글을 읽고,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노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남평문씨의 인물들을 통해 나라와 지역사회에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문바위와 장연서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통령이 되었고, 민주와 복지국가 실현을 위해 소임을 다했다. 어쩌면 남평문씨의 내력과 가통이 그것을 가능했으리라. 역사 앞에 겸허하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보는 성찰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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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준 2024-04-25 09:20:50
ㅋㅋㅋㅋㅋㅋㅋㅋㅋ바보

소나무향기 2024-01-14 22:39:29
문암.
남평문씨 이야기.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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