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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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19
  • 영산강닷컴 정문찬기자
  • 승인 2024.01.07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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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소 영원한 책사 남평 권영회 의병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갑진년 새해가 밝았다. 푸른 용의 해이다.

청용은 힘, 새로움, 도전의 기운을 의미한다고 한다. 정말이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찬 기운으로 용솟음치는 한해가 되길 기원한다.

이번에 사자성어로 ‘견리망의(見利忘義)’가 선정되었다고 한다. 이로움 앞에 의를 망각한다는 의미다. 우리 시대를 제대로 관통한 화두로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음습하고 난망한 시대. 다시 의로움을 생각한다. 죽음으로 의로움을 지키고자 했던 의병들의 삶과 정신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갑진년에 중요한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때 아닌 19979년 12·12 사태를 다룬 ‘서울의 봄’영화가 천만 관객을 모으고, 계속해서 기록을 세우고 있다. 사필귀정. 권력욕에 빠진 정치군인들이 민주주의를 말살했던 사건이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고, 그들이 지금까지 권력을 장악해 온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리고 그 집단들은 지금도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왜곡 또는 부정하고 있다.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바로잡는 것. 그래야 정의롭고 공정하고 상식적인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갑진년 연초. 한말의병 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호남의소>에서 책사로서의 역할을 다하다 순국한 권영회(권택) 의병장을 만나는 일은 각오와 다짐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다. 유생이면서도 지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권영회 의병장. 우리에게 많은 울림과 생각할 점을 던져준다.

권영회 충절비(전남 나주시 봉황면)
권영회 충절비(전남 나주시 봉황면)

 

<호남의소>의 참모로 의병 항쟁을 주도하다

권영회 의병장(1884~1910)은 1884년 남평현 욱곡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나주시 봉황면이다. 권택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유생으로 유교 경서를 많이 읽었으나 과거시험을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역에서 덕망이 높고 대담하여 마을 사람들의 지지가 높았다. 또한 평소 소탈한 성격으로 양반 유생이라는 신분적 의식도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1907년 6월 기삼연 의병장의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하여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장성‧영광‧담양‧함평‧고창‧무안 등 주로 전남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회맹소는 각 의병장들이 편성한 개별 부대를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연합작전을 전개하다가 다시 분산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이러한 분진과 합진을 신속하게 하면서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며 전투에서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권영회 의병장(1884~1910)
권영회 의병장(1884~1910)

 

1907년 12월 고창 문수사 전투와 영광 법성포 전투에서 일본군에 크게 타격을 입혔다. 일본군은 ‘호남창의회맹소’를 공격하기 위해 10개 부대로 이른바 ‘폭도토벌대’를 편성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이 거세지고,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이었던 기삼연 의병장이 체포되어 결국 조직이 와해되었다.

‘호남창의회맹소’가 일본군에 의해 와해되자 심남일 의병장은 독자적인 의병부대 ‘호남의소’(남일파)를 결성하였다. 권영회 의병장은 ‘남일파’의 모사(책사)로서 참여하였다. ‘남일파’는 심남일 의병장을 비롯해서 선봉장 강무경, 중군장 안찬재 그리고 모사 권영회가 모두 유생이었다. 따라서 다른 의병부대에 비해 엄격한 군율로서 다스렸다. 또한 의병으로서 지켜야 할 10가지 규칙을 정립하고, 친일 세력에게도 의병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전투 외적인 부분에 있어서 권영회 의병장의 제안과 협조가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전투에 있어서도 권영회 의병장은 1908년 초부터 박민홍, 조경환, 강무경, 나상집 등과 함께 많은 전투에 나섰다. 강진 오치동, 영암 사촌, 능주 노구두, 함평 석문산, 남평 거성동, 보성 천동, 해남 성내 등지에서 일본 헌병과 순사대를 습격하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승리 이면에는 일반 백성들의 자발적인 협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심남일 의병장을 필두로 한 강무경‧안찬채‧권영회 유생 의병장들의 높은 덕망과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배려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1908년 11월부터는 조경환 의병부대의 모사로서 12월까지 함평‧광주에서 활동하고, 이어 12월부터는 박민홍 의병부대의 참모장으로 나주‧남평 등지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한편 1909년 1월 이후에는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전투가 많았다. 40여 명의 의병과 함께 무안읍 일본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를 사살하고 대검 등의 무기를 빼앗았다. 일본군의 추격이 심해지자 신분을 속이고 구세군의 부위가 되기도 하였다.

1909년 9월에 장흥읍 내양리에서 친일세력의 밀고로 체포되어 1910년 4월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권영회 의병장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의로운 활동에 대해 이러한 판결은 승복할 수 없다.’며 상고했으나 6월 고등법원에서도 교수형이 확정되어 7월 1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198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덕망이 높고 담대하여 사람들이 따르다

“충절을 우러러 이글거리며 아침햇빛보다

더 붉은 우국의 단심 왜국의 침략 잡지 못하고

의려의 횃불 높이 들었네

남도의 땅 가는 곳마다 총칼을 들고

적을 무찔러 분홍의 피로 물들인 강산

끝내는 형장의 이슬 민족의 넋으로 되살아났거니

나라 위해 바친 꽃다운 청춘 갖은 형벌 이겨내어

장부의 의기를 드높였으니

아아! 고귀하고 아름다운 얼이여

겨레와 더불어 이 땅에 영원하리”

(1989. 권영회 충절비)

지금은 계급이 없고 누구나 차별받지 않은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태어날 때 신분으로 평생을 살아야했던 전근대 사회는 반인권적 반민주적 사회였음은 분명하다. 귀족과 양반, 천민과 노비의 계급사회라는 최악의 사회였다. 근대 이후 사회는 계급이 무너지고 신분 해방이 이루어져 하늘 아래 인간은 차별받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역사는 변화 발전하고 진전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계급사회로 구분되고, 차별받은 사회였다. 한말에도 그랬다. 동학혁명 이후 신분제 폐지가 이루어지긴 했으나 실제적인 차별은 여전하엿다. 기울어져 한말의 외세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 활동에 유생들이 적극 참여한 것은 그나마 선비정신의 발로였다. 충과 효, 그리고 절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명가 출신의 권영회는 유생으로서 덕망을 쌓았고, 또 담대하여 지역민들이 존경하고 따랐다. 남도의병의 의병장들은 유생출신으로 구국안민의 정신과 선비 정신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부자, 형제, 가족들의 의병 활동은‘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형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는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한다. 이는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도덕의식은 계층간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생취의 솔선수범하는 지도자를 만나고 싶다

갑진년 새해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 야당 지도자를 살해 미수 사건이 터졌다. 민주주의와 인권과 생명이 존중받는 시대에 그야말로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일이 일어났다. 충격 그 자체이다. 공정과 상식, 포용과 화합의 가치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대한민국에서 혐오와 대립으로 급기야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어떤 이유로든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더구나 한반도를 둘러싸고 남북한의 극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으며, 일본은 독도를 버젓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는 풍전등화의 형국이다. 다시 일본은 한반도를 위협하며 다양한 형태로 압박하고 있다. 온 국민이 대동단결하여 냉정한 국제 정세와 대립에 대응하고 대비책을 세워야 할 때이다. 일찍이 일제의 간악한 침략에 맞서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의병들에게서 진정 배워야 할 것은 의로움과 당당함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의병장의 삶과 정신을 잃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지도자들을 만나고 싶다. 또한 잃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잃지 않으려는 시민들의 깨어 있는 정신과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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