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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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18
  • 영산강닷컴 정문찬기자
  • 승인 2024.01.06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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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이 살다간 애국청년 신영일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1970년대 말 긴급 조치로 연명하던 유신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권 탄압으로 국제적인 여론이 좋지 않자 미국과 일본 등도 점차 박정희 정권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더구나 경제마저 어려워지자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급속도로 커져 갔다. 나라 안팎에서 궁지에 몰린 박정희 정부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해 나갔다. 이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요구되던 시기 신영일은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2학년 때인 1978년 6월 29일 전남대 '민주교육지표사건'으로 무기정학을 당한 후 박기순 열사와 함께 들불야학 창립을 주도하였다. 박관현 열사 등과 함께 '광주공단노동자 실태조사' 활동에도 참여해 야학 및 학생운동의 질적 발전에 기여했다.

애국청년 故 신영일

 

이후 1981년 '반제반파쇼투쟁선언서'를 발표하면서 5·18민중항쟁 이후의 공포와 패배 분위기를 깨뜨려 버린 전남대 교내 시위를 주도를 시작으로 교도소 투쟁, 청년 대중운동의 지역화와 전국화 그리고 국민의 힘으로 이룩한 직선제 쟁취의 6월 항쟁까지 10여년을 불꽃같이 살다간 남평 출신 애국청년 고 신영일의 삶을 소개한다.

사실 신영일은 남평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거의 모르고 있다. 말하지 않았고, 가르쳐주지 않았고, 또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지역에서 알고 기록하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치열하게 살았던 인물들의 삶과 정신을 이어갈 때 현재를 제대로 인식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애국청년 신영일, 학습으로 세상에 나오다

신영일은 1958년 10월, 나주시 남평면에서 아버지 신만원과 어머니 김순례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주로 이사하여 중흥초등학교·북성중학교를 거쳐 1973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키가 작고 내성적이었지만, 2학년이 되면서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면서 매우 활발한 성격으로 변하였으며 기타를 잘 치는 등 발랄한 학생이었다.

사춘기의 방황을 겪으면서, 1976년 재수 시절에는 ‘갈매기의 꿈’을 읽고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라는 구절을 외우고 다니면서 망나니 같은 친구들과 함께 ‘조나단’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커피숍을 빌려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다가 훌륭한 교사가 되겠다는 벅찬 꿈을 안고 전남대 사대 국사교육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서도 통기타를 치며 대학가요제에 자작곡을 만들어 참가하기도 하였다. 통기타와 담배와 막걸리, 그리고 미팅 등 여러 가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더부룩한 까까머리에 새까만 얼굴과 거무튀튀한 피부, 크고 둥근 눈에 넓적한 안경, 그 어디에도 꾸민 데라고는 없는 좀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신영일은 학술모임(당시에는 서클이라고 했다)인 독서잔디에 가입하면서 사회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78년 봄부터 문리대와 사대생 중심의 소모임은 ‘전환시대의 논리’, ‘8억 인과의 대화’, ‘역사란 무엇인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페다고지’ 등을 읽고 잔디밭이나 사회대 뒤 허름한 막걸리 집에서 한번 토론을 시작하면, 결론이 날 때까지 그는 결코 물러날 줄을 몰랐다. 막걸리 잔을 들이킬 때의 그 재미있고 순박했던 모습, 시커먼 얼굴에 세수를 며칠째 안 했는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가끔 토론하다 지치면 그는 기타 반주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대학생들의 아침이슬, 농민가 등 학생운동과 관련된 노래들이었다. 신영일이 부르던 슬프지만 경쾌한 리듬의 이 노래 실력은 후일 ‘너희는 새벽이다…’의 들불야학 학당가로 발전하게 된다.

1978년‘우리의 교육지표’선언 투쟁에 함께 하다

유신의 공포정치에 눌러 위축되었던 학생운동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할 무렵 수년만인 1978년 6월 27일 전남대 송기숙 교수(해직·구속)를 비롯한 11명의 교수(김두진․홍승기․이상식․이석연․김동원․이계명 교수 포함)가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전원 중앙정보부에 연행·해직되자, 이에 항의하여 전남대·조선대 학생들이 연행 교수 석방과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교내투쟁과 가두시위를 하며 항의했다.

6월29일 오후, 전남대 중앙도서관 3층에는 시위를 하는 300-400명 학생이 가득 찬 가운데 시위가 시작되었다. 당시 시위는 문승훈(국사3년), 노준현(공대3년.작고)이 주도하였으나 당시 농성장에 참여했던 신영일은 자발적으로 나서 "국사학교 2학년, 신영일입니다. 연행교수들이 석방되고 긴급조치 9호가 철폐되기 위해서는 우리 학생들이 끝까지 항의해야 합니다. 해방가를 합창합시다."고 하면서 시위를 적극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도서관에서 경찰에 의해 끌려나온 학생들이 분수대 부근(현재의 5.18광장)에서 시위를 계속하다 신영일은 서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한편 신영일과 노성태 등의 도움으로 도서관에서 빠져나간 문승훈, 고 박기순 등은 다음날 아침 9시경 전남대 정문 앞에 집결하여 100여명의 학생들과 시내로 진출하여 시위하고 이후 도피를 하다가 검거되었다. 이 시위로 교수 11명 해직(1명 구속), 재야인사 2명 구속, 학생 18명 구속·제적, 10명 무기정학을 당하게 되는데, 신영일도 포함되었다. 6.29시위는 신영일이 전남대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전남대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다

1970년대 후반 들어 산업공단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초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한 채 실업 상태로 머물러 있던 도시 빈민이나 농촌의 청소년들이 노동자로 대거 취업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당시 수도권 지역에 밀집한 공단을 중심으로 야학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는데 전태일 분신이후 노동야학이 이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해남 송지 월례 답사(박병섭,이영해,장석웅,임주형,신영일,배환중)
해남 송지 월례 답사(박병섭,이영해,장석웅,임주형,신영일,배환중)

 

1978년 여름 방학 중 당시 광주 출신으로 서울에서 야학을 하다가 제적당했던 전복길·김영철(서울대), 휴학 중이던 최기혁(한국외국어대)과 나상진(전남대)은 박기순·신영일·임낙평과 광주지역에서도 야학을 시작했다. 광천동 천주교회의 아일랜드 출신 미카엘 신부를 만나 교리 연습실을 야학당으로 쓰도록 허락받았다. 장소 문제가 해결되자 본격적으로 교재 준비, 책상 만들기, 포스터와 유인물 제작, 강의를 위한 학습 등을 위해서 거의 매일 만났다.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한 유현종의 소설‘들불’에서 야학 이름을 정했다. 그러나 신영일은 무기정학이 부모님에 대한 불효가 아닌가 하여 못내 괴로워했다. 한번은 야학 준비모임에 그가 나오지 않자 걱정하던 동료들이 조심스레 그의 집을 찾았다.

“가기 싫어서 안 갔다. 광천동 학당으로 버스타고 가다가 왠지 외롭고 불안해서 버스에서 내렸고 걷다가 집으로 왔다. 왠지 마음이 뒤숭숭하다......”

가정과 사회 그리고 운동의 길에서 인간적 고통과 갈등을 극복하면서 그는 자기가 가진 역량을 마음껏 발휘해가기 시작했다. 야학수업에서 빠르고 박력 있는 어조로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득력 있게 강의를 잘 하였다. 성격이 낙천적이고 웃는 얼굴이어서 걱정거리가 없는 듯 보였지만 허리가 좋지 않아 통증 때문에 가끔 누워있는 경우가 있어 어머님도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신영일은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믿음을 받았다. 그 만큼 신영일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는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적어도 신영일의 운동 철학은 뜨거운 인간 사랑이었으니 그 힘은 강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처럼 건강이 충분히 뒷받침되지도 못하면서 놀라운 투혼을 발휘했던 것은 뜨거운 인간사랑에서 비롯하였을 것이다.

광천동 천주교 야학당
광천동 천주교 야학당

 

다음은 그가 작사 작곡하여 만든 '들불학당가'다

"너희는 새벽이다. 밝아 오른다. 너희는 새암이다. 솟아오른다.

심지에 불 댕기고 앞서 나가자. 민족에 새 아침이 밝아 오른다.

땀과 눈물 삼켜 가면서 뛰어가자 친구, 사랑하는 친구, 들불이 되어.”

1978년 후반기부터 윤상원·김영철의 가세와 함께 박기순을 주축으로 전용호와 배환중(전대 국사교육과), 박관현, 고희숙(전대 영교과) 등으로 야학의 강학을 보충하고, 신영일·장석웅(전대 국사교육과)·박병섭(전대 국사교육과)·안진(전대 사회학과)·김정희(전대 영교과)·박관현(전대 법대)·박용안(전대 법대) 등 학생 운동권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람은 따로 모여 광천공단의 실태조사를 시작하였다. 1979년 봄 학기가 시작되자 같은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사회조사연구반을 창립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1978년 12월 25일 새벽 야학교실 난로의 땔감을 해놓고서 피곤에 지친 몸으로 자던 ‘영원한 노동자들의 누나’ 박기순은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었다.

광천공단의 실태조사도 여러 악조건을 극복하고 마무리 되면서 1979년 3월 신영일은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이제 그는 전대 학생운동권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는 다양한 선전활동 강화와 비공개 소모임 조직의 활성화, 학년별 대표자회의의 비공개 상설화로 유신독재에 타격을 주기위해 노력하였다. 1979년 10월 부․마 항쟁 소식이 대학에 전해 졌다.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고 몇 명은 죽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소문을 접한 운동권 학생들은 놀람으로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사대 여학생 화장실의 ‘유신독재타도’ 매직펜 사건, 충장로 유인물 배포 사건, 고희숙·김경희(국사교육과)·박유순(철학과)의 상담지도관실 방화 사건과 반정부 유인물 편지 사건이 10월경에 연달아 발생했다. 상담지도관실 방화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용의선상의 인물들을 닥치는 대로 연행 조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반정부 유인물을 작성하여 우편 발송하고 교내유인물 살포, 교내시위음모 등의 혐의로 장석웅(당시 율어중학교 근무 중)을 구속하였으며 그 배후자로 윤한봉을 지목하여 두 사람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신영일은 고문과 몽둥이로 구타당하면서도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 때문에 몽둥이로 심하게 맞아 다리에 큰 상처가 생겼다. 경찰들은 독종이라고 혀를 찾다. 이들이 구속된 동안 10.26이 일어나 구류 후 훈방되었다.

1980년 5․18민중항쟁과 1981년 전남대 9․29사건을 주도하다

유신체제가 무너진 후 억눌렸던 민주화의 요구가 사회 곳곳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1980년 봄이 되면서 민주화 열기는 더욱 거세졌다. 학생과 시민들은 유신 헌법의 폐지, 전두환 퇴진, 10.26사태로 내려진 비상계엄 철폐, 민주적인 절차를 통한 민간정부 수립 등을 요구하였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 꽃피는 상황에서 신영일 등은 학생운동이 더욱 발전하려면 두 가지 운동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첫째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지도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총학생회의 진출이고, 둘째는 운동의 질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 제반 문제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80년 3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주최한 공청회에서 연사로 참석한 박관현은 사자후 웅변으로 학생들을 감동시켰으며, 이를 계기로 4월 압도적인 지지로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신영일과 학생 운동가들은 총학생회의 부활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연구학회 창설을 준비하였다. 그해 4월 학생회관 4층 소강당에서 '학생 신입생 연합 오리엔테이션'을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참여한 학회는 '기독학생회' '근대사학회' '사회조사연구회' '노동문제연구회' '민속문화연구회' '여성문제연구회' 등이었고, 이와 궤를 같이한 '후진국경제학회' '민족문학연구회' '농민문제연구회' 외에 몇 학회가 더 있었다.

5․18은 신영일에게 커다란 시련이었다. 대다수의 대학생들이 그랬고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대학생들은 선뜻 도청과 금남로로 나가지 못했고 총을 들지도 못했다. 신영일은 들불야학의 윤상원 선배와 광천신협에 계셨던 김영철 선배를 존경하였다. 윤상원 선배는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총탄에 맞아 돌아가시고, 김영철 선배는 계엄군의 폭력적 진압과 수사기관의 고문후유증으로 인해 심신이 파괴되었다. 모두는 5․18항쟁 이후 오랫동안 그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결국 1980년 5․18로 복적생·총학생회 임원, 단과대 학생회 임원 등과 광주의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내란죄 등으로 구속되었는데, 다행히도 신영일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그의 어깨에 지워진 짐은 클 수밖에 없었다. 송두리째 박살난 전남대와 조선대의 학생운동 역량을 재건해 내기 위해 1980년 10월부터 1981년 2월경까지 그는 김정희, 김경옥, 고희숙, 김전승 등과 김경옥의 자취방 등지에 모여, “5월 항쟁으로 앞으로의 학생운동은 일회적 시위 방식으로는 독점자본과 군사독재를 무너뜨릴 수 없으므로 노동자, 농민 지식인, 청년학생의 연대를 통한 반제·반파쇼전선을 형성하여 조직적인 투쟁을 통해 민족통일과 민중 해방을 쟁취”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학생운동은 이제 새로운 조직으로 재편해야 되며, 올바른 이념과 조직 체계를 정비하여 지도부의 지도아래 학년별로 체계적인 학습 모델을 만들어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 이를 각 조직에서 운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각 학회 및 동아리는 합법적인 틀을 갖추되 활동 내용은 비합법 투쟁 단위로 준비”하는 것을 체계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980년 2학기와 1981년 1학기에 각 학회와 동아리의 학습 커리큘럼은 통일되어 체계적인 학습이 가능해졌고, 각 동아리도 반(사회조사연구반 등)으로 이름을 변경하여 합법적으로 등록한 가운데 조직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학생운동 지도·운영 시스템을 확정한 후 자신은 학교를 떠날 때 쯤 일회적인 투쟁(선동이나 시위)이 아닌 "반제·반파쇼투쟁선언" 즉 1980년대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9.29 선언(반제·반파쇼 민족해방 투쟁선언)"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선언에 대해 책임지기 위하여 감옥을 각오하고 청년 민중운동가로 변신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는 임낙평·이광호(전대 사회학과)와 함께 자신의 신념을 1981년 9월 29일 오후1시 전남대 식당에서 터뜨렸다. ‘반제·반파쇼 민족해방 학우투쟁 선언’을 배포하고 오후 4시경까지 도서관 앞 광장 등에서 시위하다가 일부가 후문 담을 넘어 서방시장 앞까지 진출하였다. 5․18 이후의 최초 광주 시가지 시위였다. 선언문은 전두환 정권을 명백한 민족의 적으로 규정하고, 반드시 타도할 것을 밝혔고, 전두환 정권을 감싸고 있는 매판, 파쇼 집단에 노․농 대중과 학생지식인이 총궐기 하자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진보적 내용을 담고 있었고, '빨갱이' 소리를 들을 것을 각오하는 내용이었다. 시위현장에서 빠져 나왔던 신영일, 임낙평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 1급 수배령이 내려졌다. 임낙평은 1개월 만에 ‘안기부’요원들에게 체포되었고, 신영일은 도피 6개월여 만에 광주서부경찰서에 자수형식으로 출두했다.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와 도피생활의 불안감이 가중되었기 때문에 법정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청년운동(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의 깃발을 들다

1982년 신영일은 광주교도소에서 박관현 열사와 만나게 되었다. 그는 박관현과 같은 재판부에 사건이 배속되었다. 0.75평 독방 수감 중에도 한편으로는 법정에 나가 5․18진상규명과 6․29시위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법정투쟁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도소 내 처우개선을 주장하며 40일간 단식투쟁하였다. 이때 함께 단식투쟁했던 박관현 열사는 10월 12일 숨지고, 신영일은 기적적으로 소생하였으나 이때의 고통으로 신경쇠약증세가 나타나 1983년 병보석으로 출소하였다. 단식원에 다니면서 치료에 열중했다. 얼굴에는 핏기가 없고 말하기조차 힘이 든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는 학생 때 가졌던 열정과 불의에 대한 분노가 그대로 살아 있었다. 자신의 끈질긴 노력으로 건강은 차츰 좋아져가고 있었다.

1984년 접어들면서 광주지역 재야운동은 1980년 패배 이후의 긴 좌절과 침묵의 터널을 지나 대정권 투쟁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1984년 초 매월 18일에 모여왔던 5․18관련자들의 모임에서 신영일은 활동을 시작하였다. 주로 재야인사와 5․18 구속자를 중심으로 정동년(6․3항쟁과 5․18로 구속)과 함께 1984년 8월에 ‘광주의거구속자협의회’를 결성하고 간사를 맡았다. 그러나 명망가들이 주도하면서 주변화된 집단이 소극적으로 참여하고, 대응전략도 온건론과 급진론의 입장 차이로 구속자협의회가 잘 움직여지지 않자 청년운동가들이 독자적 운동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울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과 같은 청년조직을 광주에서도 만들자는 논의가 있으면서, 1984년 11월 18일 광주 YMCA 백제 실에서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았던 정용화 등을 중심으로 청년운동가와 재야인사 150여명이 모여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1985년 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으로 개칭, 약칭 전청련)’을 창립했다. 197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청년들과 5․18 구속자들이 중심이 된 전청련은 1980년 이후 광주․전남지역 최초로 반독재투쟁을 표방하는 공개운동단체가 되었다. 정상용(5·18당시 도청 지도부)이 의장을 맡고, 정용화((교육지표사건과 5․18로 구속)·김종배(조대 법대)가 부의장을 맡았다. 그리고 송재형(전대 졸업)은 총무부장, 신영일은 홍보부장, 이춘희(전대 졸업)·장갑수(조대 졸업)·양희승(조대 졸업)·정재호(들불야학)·이우정(조대 졸업)·김상집(5·18구속자)·김창중(카농)·전용호·이재의(전대 졸업)·이춘문(전대) 등이 실무를 담당했다. 패배주의에 빠져있던 광주·전남의 민주화운동 세력이 출신고교와 대학, 부문별 운동을 뛰어 넘어 전청련을 중심으로 연대하여 새로운 장을 열기 시작하였다.

11월 23일 임동성당에서 열린 ‘추수감사제 및 농민대회’에서 농민 2,000여명과 청년․학생운동 세력이 연대하여 연대 투쟁의 전형을 만들어내면서 이를 실무적으로 주도한 전청련의 신영일과 카농의 김창중이 운동론의 새로운 발전 논의를 제기하였다. 그 결과 12월8일에는 광주카농과 전청련, 기독교농민회·기독교노동자연합·기독교청년회·광주민중문화운동협의회·목포민청·나주민청·5·18부상자회 등의 단체가 참여하여, ‘전남사회운동협의회(전사협)’라는 민중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고 민중운동 중심의 지역운동으로 재편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화되었다. 전사협은 80년대 중·후반기에 지역운동의 협의기구이자 실질적인 지도부로서 기능했고, 6월 항쟁 과정에서도 국민운동본부의 산파역을 했으며 비상대책위를 만들어 집회와 가두투쟁을 주도했다.

YWCA 6층 청년운동 시절의 신영일
YWCA 6층 청년운동 시절의 신영일

 

한편 전청련은 군부독재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 굳건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각종 홍보물을 통하여 군부독재를 타도해야 한다는 선전을 강화하고, 집회와 모임을 조직화해 가면서 그 영역을 넓혀갔다. 전청련은 기관지 ‘광주의 소리’를 1984년 12월 23일 발간하여 민주화운동의 과학적 운동이론을 제공하고, 1985년 1월20일에는 ‘광주’를 창간하여 배포했다. 또한 시민대중의 잠재적 투쟁 역량을 선도하기 위해 ‘만민공동회’와 같은 토론회를 개최하였으며 민중 생존권투쟁을 지원하여 대중적 토대를 강화하였다. 1985년 1월 광양만 김 양식장 피해 조사, 광주 신가리 주민 시위사건 조사와 3월에는 광천동 KM사 노동자 탄압에 대해 연대지원투쟁, 9월에는 함평·무안 농민 소값 파동과 농수산물 수입개방 반대투쟁에 참여하였다.

신영일의 활동은 운동의 조직과 발전, 동료들에 대한 세심한 관심과 배려로 가득 채워졌다. 골방에서 언 손을 녹여가며 탄압과 투옥의 위험을 극복하고 자신을 헌신했다. 항상 원칙을 지켰던 원칙주의자로, 뜨거운 가슴을 가진 휴머니스트로 늘 치열한 삶을 살아 왔던 신영일이에게는 적당하게 안주하고 타협하는 일이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뛰어난 이론가로서 전청련 기관지 ‘광주의 소리’ 발간을 주도하였고 ‘만민공동회’의 기본 틀을 만들었다. 당시 ‘광주의 소리’를 통하여 제기한 신영일의 ‘지역운동론’은 전국의 지역운동을 활성화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집필한 ‘청년운동론’, ‘민주주의와 청년’, ‘지역 청년조직에서의 강의록(보성·나주)’ 등에는 그의 역사적 상황 분석, 예리한 통찰력과 과학적 운동론이 잘 드러나 있다.

청년운동의 절정에서 개헌투쟁의 전국화에 나서다

1984년부터 전두환 정권의 유화 국면을 상대적으로 활용하여 광주전남 지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민주화운동단체들이 결성되고, 그 활동의 폭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운동단체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통합해가면서 1985년 3월2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결성하였다. 전청련도 민통련에 참여하였으며, 신영일의 치열함과 철저함은 민통련에서도 발휘되었다. 1986년 들어 반전두환 민주화운동 역량이 커지면서 옛 야당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신한민주당(신민당)은 직선제개헌을 목표로 전국 순회 개헌추진현판식을 거행하기로 하고 그 시작을 3월 30일 광주로 정하였다. 전청련은 치열한 논쟁을 거쳐 ‘민주헌법쟁취’를 구호로 ‘광주의 소리’ 24호를 수천 부 제작하고 개헌 현판식장을 대중 시위 공간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광주에서의 당시 신민당 개헌현판식 행사는 약 10만 시민이 80년 5·18이후 최대 인파가 운집했다. 이때 시민들 앞에 YMCA옥상에 등장한 신영일은 민주헌법쟁취를 역설하면서 우렁찬 구호와 몸짓으로 투쟁을 이끌었다. 금남로에서는 1진 김전승(전대), 2진 정순철(카톨릭농민회), 3진 위성삼(조대) 등이 대인동터미널, 금남로·도청을 중심으로 밤12시경까지 ‘군부독재 퇴진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로 인해 위성삼과 김태찬(5·18기동타격대 출신)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신영일은 수배되었다. 대구 민통련과 강원도 원주의 민통련 중앙회의에서 광주의 경험을 전달하고 ‘반군사독재 민주화투쟁을 전국적·전대중적으로 확대할 것’을 제안하고 그 결의를 이끌어냈다. 즉 공식적인 행사는 신민당에서 개헌현판식에 모인 대중을 모아 주관하지만, 자칫 형식적 집회가 될 수도 있는 대회를 국민적 열기를 모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적극적 대중 시위로 이끌어 대대적인 투쟁을 벌이는 것은 민통련 산하의 각 지역 운동단체들로 하자고 합의한 것이다.

5․3인천 개헌현판식 투쟁으로 고조된 국민의 열기는 이듬해 6월 항쟁으로 이어져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5․3인천 개헌현판식투쟁은 민통련 지역운동협의회 이호웅위원장이 사회를 맡으면서 민통련의 장기표·여익구·박계동·조춘구·안희대·이우재 등과 광주의 정동년·신영일 등이 연설을 했다. 이들을 포함하여 37명에게 수배조치가 내려졌고, 신영일은 경찰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서울과 광주 선․후배 집들을 전전해야했다. 1986년 후반 수배가 된 상태에서도 민통련 본부의 이명식, 같이 수배 받던 전주의 이광철, 대구의 김균식·인천의 이우재 등과 서울에서 수차례 만나 재반격을 논의하면서 역할 분담을 나누었다.

당시 결혼을 하여 두 아들을 둔 신영일은 가끔 지인을 통해 부인과 아이들을 만나 행복한 시간을 갖곤 하였다고 한다. 특히 장갑수와 신영일은 서울의 박계동과 같이 정순철의 아파트에 숨어있던 1986년 추석에 부인 김정희 선생과 아들이 찾아왔다. 이때 보여준 신영일이의 가족사랑은 놀랄만한 것이었고 한다.

1987년 봄 신영일의 수배 조치는 지역 인사들의 노력으로 간단한 조사 절차만 거치고 해결되었다. 이 당시 전청련의 조직 노선도 상당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동안 선도적 청년들에 의한 정치조직이었다고 한다면, 앞으로의 전청련은 일하는 청년들이 중심이 되는 대중적인 청년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생활과 운동의 통일’ 방침에 따라 신영일도 생활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고자 낮에는 직장(의료기 상사)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청년운동을 하는 강행군을 시작하였다. ‘전청련의 올바른 발전을 위하여’라는 문건을 발표하여 전청련 전망을 제시하였으며, 1987년 6월에는 전청련 지역위원회 즉 광주·목포·순천·나주·보성 지역위원회를 건설하면서 6월 항쟁을 주도하였고 ‘청년학교’라는 민주시민교실을 8기까지 운영하기도 하였다. 6월항쟁 이후에는 학생운동 관련 투옥 전과를 이유로 교사 발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미발령대책위’ 조직에 참여, 교사 발령 투쟁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애국청년 신영일 투사의 묘
애국청년 신영일 투사의 묘

 

영원한 투사로 영면하다

몸이 약한 신영일 이에게는 직장생활과 청년운동의 병행은 상당한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김대중 후보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넘어 당선 투쟁을 총력적으로 전개했지만, 그 패배는 허탈했다. 대선 패배 후 신영일과 전청련 지도부는 조직을 추스르고 새로운 활동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더욱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나 그동안의 전청련 활동, 매일 토론과 과로로 인한 기력 탈진과 한차례의 휴식도 없이 달려온 그를 병마가 가만두지 않았다.

1988년 4월 어느 날 전청련 청년회 모임을 끝내고 송재형 의장과 신영일은 술집에서 새벽녘까지 조직과 개인의 신상 등 못다 한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바로 그날 몸이 몹시 좋지 않다고 병원에 간 신영일은 장티푸스(열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곧 털고 일어나리라고 기대했던 병은 점점 악화되어 1988년 5월 9일 그는 영영 우리 곁을 떠나갔다. 광주기독병원에 누워있던 신영일은 회복되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기원해 보았지만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의지가 강하고 굽힐 줄 모르던 기개도 이미 무너진 건강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남은 사람들은 5월 11일 ‘애국청년 고 신영일 열사 민주시민장’으로 끝내 민주세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보냈다. 그는 살기 위해서 죽자고 했다. 그의 말처럼 불꽃처럼 살다간 애국청년이었다.

신영일 평전

 

음습하고 난망한 시대에 애국청년 신영일은 다시 민주주의와 청년운동의 아이콘으로 재생하였다. <신영일 평전>이 출간되었다. 유신 정권과 군부독재 시대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하며 청년운동을 주도했던 신영일. 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에서 태어나 우리 지역의 청년의 기상을 보여준 신영일.

이제 우리가 기억하고 그의 삶과 정신을 이어가야 할 책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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