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17
상태바
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17
  • 영산강닷컴 정문찬기자
  • 승인 2023.12.24 18: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도의 서정성을 담은 민족음악가 안성현 선생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소월 시 에 작곡가 안성현이 곡을 붙인 동요다.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누구나 어린 시절에 불렀던 노래다. 그런데 이 노래는 다양한 곡조로 편곡되어 불려지고 있다. 그 중 안성현은 일제강점기 시기 곡을 붙인 최초 작곡가다. 이 곡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미국 군정청이 발행한 국민학교음악교과서에 실렸고, 그 이후에도 음악교과서에 수록되어 오랜동안 동요로서 불려지고 있다.

이 노래를 작곡한 민족음악가 안성현
이 노래를 작곡한 민족음악가 안성현

이 노래를 작곡한 민족음악가 안성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번에는 남평 출신으로 남과 북에서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은 안성현을 만나보기로 한다.

민족음악가 안성현은 1920년 나주 남평면 대교리에서 태어났다. 1936년 말 아버지 안기옥(가야금 산조 명인)을 따라 함경남도 함흥으로 이주하기까지 남평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살았던 드들강은 화순과 나주를 흐르는 지석천이 남평에서 영산강과 합수한 지점이다. 홍수를 막기 위해 '드들'이란 처녀를 제물 삼아 둑을 쌓아 '드들강’이라고 한다.

지금도 강물이 범람하면 '드들드들'하는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80년대 전반까지도 물이 맑고 금모래가 많았다. 드들강 상류에 댐이 건설되고, 영산강 하구언이 개설되어 바닷물이 유입되지 않아 수량이 크게 줄어든 영산강과 드들강은 옛 모습을 잃어버렸지만, 안성현이 어린 시절을 보냈을 시기에는 드들강은 금모래와 자갈돌이 아름답게 빛나는 풍경을 가졌다. 그가 소월 시에 서정성을 더해 '엄마야 누나야'를 작곡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의 감수성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함흥에 살던 안성현은 1940년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의 도호음악대학 성악부에서 성악과 작곡을 배우고 지휘까지 공부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한 뒤 전남여자고등학교, 광주사범학교 등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작곡집을 출간하였다.

이후 목포공립항도여자중학교(현재 목포여고)에 재직하던 1948년에는 같은 학교 박기동이 세상을 떠난 누이동생을 기리기 위해 쓴 시 '부용산'에 곡을 붙였다. 부용산은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라는 시대적 상황과 정서를 고스란히 담았다. 당연히 부용산은 현대사의 아픔으로 기억되는 빨치산들이 구전으로 불러지게 되고, 결국 금지곡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 평양 학예음악회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나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50여 년 동안 이념대립의 소용돌이 속에 철저히 잊혀졌다. 북한이 2006년 사망을 공식 발표하면서 음악인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됐다. 북한에서도 인민공훈 예술가로 인정을 받았다.

엄마야 누나야 작곡가 안성현 표지판

잊혀지고 몰랐던 안성현을 늦게나마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2006년 남평출신 안성현의 타계 소식이 전해졌다. 남평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안성현 노래연구회>를 만들어 그가 작곡했던 노래와 자료를 수집하였다. 마침 안성현 선생의 부인이 남한에 생존해 계셨고, 연락이 되어 안성현의 음악을 조명하기 시작했다.

나주문화원은 2016년 10월 7일에 '제1회 안성현 선생 국제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그때 안성현 연구가로 활동하는 최옥화 교수는 안성현 선생에 대해 “중국 조선족 동포는 물론 중국 사람들도 애창하고 있는 국민 가곡 '해당화'를 작곡한 분으로, 작곡가로서 뿐만 아니라 지휘자, 연구자로 활동하면서 순수 우리 민족 음악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영웅이다”고 높게 평가했다. 이어 그는 "안성현 선생의 부친이신 안기옥 선생 또한 조선민족음악무용연구소장 등을 지내며 수많은 연구서와 창작 국악곡 등을 작곡했으며, 수많은 후학을 양성해 우리 민족 국악 발전에 더할 수 없는 공들을 세운 음악가였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안성현이 남긴 노래와 활동을 정리한 <안성현 백서>가 출간되었다. 만시지탄 다행스러운 일이다.

안성현 노래연구비
안성현 노래연구비

드들강 솔밭 유원지에서 <안성현 노래연구비>가 건립되었다. 남과 북을 아우르는 작곡가로서의 명성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나주에서는 안성현 선생을 소환하고 다양한 형태로 음악회가 추진되었다. 그리고 지난 2020년에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음악가 안성현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안성현의 생가 복원, 음악회, 솔밭 안성현 노래비 관리 등의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였다.

이후에 나주예총을 비롯 여러 단체들이 안성현 음악회를 진행하고 있다. 안성현이 다녔던 남평초등학교는 합창단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 그리고 학교 축제에서도 안성현의 노래를 공연하고 있다.

 

남도인의 엘레지, <부용산>의 기구한 운명

금지곡이었던 <부용산>은 안치환을 비롯하여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크하여 세상에 다시 알려진다. 부용산 노래의 운명적인 탄생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부용산 시비(전남 보성군 벌교읍)
부용산 시비(전남 보성군 벌교읍)

음악선생 안성현과 국어선생 박기동은 목포 항도여중에서 만나 소울메이트가 된다. 조희관 교장이 두 사람을 아껴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친해진 탓도 있었지만, '음악과 시'라는 예술적 감수성이 통했기 때문이다. 박기동은 시를 쓰고 안성현은 그의 시에 운율을 입혀 노래로 만들었다.

사실 부용산은 요절한 누이를 그리는 오라비들의 비가였다. 안성현과 박기동은 어린 누이들이 있었다. 안성현은 아버지 안기옥이 북으로 떠난 뒤 그가 보살폈던 안순자가 있었고, 박기동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동생 박영애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동생들은 1947년 같은 해에 불치의 병, 폐결핵으로 오라비들의 곁을 떠난다. 박영애는 스물넷이었고, 안순자는 열다섯 나이로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였다.
박기동은 벌교 읍내에서 오리 길인 연꽃 모양의 부용산 기슭에 어린 동생을 묻고 내려오면서 사무치는 그리움과 애틋함이 담긴, 누이를 기리는 시 <부용산>을 남긴다.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먼저 저세상으로 간 어린 누이들을 가슴에 묻고 동병상련을 앓고 있던 음악가와 시인은 또다른 죽음을 맞이한다. 해방을 맞아 경성사범학교에서 고향인 목포 항도여중으로 전학 온 문학소녀, 김정희라는 학생이 폐결핵으로 열여섯의 나이에 요절했다. 안성현은 아끼던 제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박기동의 시 <부용산>에 운율을 입혀 노래로 만들었다.
그렇게 시와 노래로 만들어진 <부용산>은 안성현과 박기동의 누이 안순자(15)·박영애(24)·제자 김정희(16), 세 명의 어린 죽음을 애도하고, 요절한 누이를 그리는 오라비들의 아리고 슬픈 노래였던 것이다.
그런데 격동의 시기, 남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가던 슬픈 노래는 또 다른 운명을 맞게 된다. 1948년 10월에 발생한 '여순사건'으로 산으로 쫓겨간 빨치산들은 애잔한 곡조와 노랫말에 매료되어 <부용산>을 즐겨 부르며 슬픔을 달랬다. 오라비들의 엘레지는 '빨치산의 노래'가 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9월 안성현에게 빨갱이 낙인을 찍히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동경 유학시절 알고 지냈던 '월북 무용가 최승희'의 딸 안성희가 무용 공연차 목포에 왔다. 안성현은 아버지 안기옥과 최승희를 만나기 위해 안성희의 북행길에 동행했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길이 막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안성현은 그렇게 '월북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지금도 월북이니, 납북이니 논쟁이 없지 않다. 분명한 것은 분단 이전의 왕래가 6.25전쟁으로 씻을 수 없는 분단이 되어 남북이 갈라지고 좌우대립과 통제로 남았다. 누구의 잘못일까.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남한에서 작곡가로서, 음악교사의 역할을 다했던 안성현.

남평 드들강의 금모래 빛과 피어오르지도 못한 누이를 위해 민족적 서정성을 담은 노래를 작곡하고 불렀던 민족음악가로서 기억하고 노래하는 것이 후세들의 역할이 아닐까.

아쉬운 것은 <민족음악가 안성현기념사업회>가 제대로 정립되어 기념 및 선양사업을 총괄하여 추진했으면 하는 것이다. 현재에도 여러 단체들이 제각각으로 추모 및 헌정음악회를 추진하고 있는데, 다소 혼란스럽고 어수선하다. 이제라도 안성현 선생 생가 복원 및 안성현 음악기념관을 개관하여 남도인의 정서와 한을 담은 노래들이 계속 기억 계승되었으면 바람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