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과 무소유의 목회자 고 정규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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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과 무소유의 목회자 고 정규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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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12.24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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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과 무소유의 목회자 고 정규오 목사님

프로파일 성경환목사 2021. 1. 29.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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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정규오목사01
71정규오목사01

 

사모나 자식을 위해 통장 하나 남기신 게 없다

해원 정규오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들으며 ‘결국 그분도 가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십 수년 전부터 새해 아침이면 “아마 오늘이나”라는 휘호를 남겨온 어른이 병상에 누우신 지 벌써 몇 해더냐? 임종의 소문이 수 차례 지났으면서도 여전한 총명함으로 강단에 서면 열정적으로 복음을 설파하신 어른이다. 2년 전이던가? 설교 시간을 할애 받은 어른은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을 외우시므로 설교를 마치셨다. 세월이 지나, 하늘과 세속의 이치를 다 터득하고 나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 남는다는 가르침이셨을까?

정규오 목사님과 우리 집안 어른들의 만남은 꾀 오랜 사이다. 1950년대 고흥에서 목회하실 때 우리 할머니와 부모님들께서 그 교회에 출석하셨다. 아직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지만 깡마른 체구에 정확하고 간결하게 설교하시던 정목사님의 가르침은 우리 집안의 신앙을 결정했다. 할머니의 무릎에서 신앙을 배운 나로서는 목사님의 엄격한 가르침을 배웠을 것이다. 말을 배우면서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과 할머니의 서원을 자연스레 받아들였으니 강직한 믿음의 색깔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한 후 나는 말로만 듣던 정규오 목사님을 만났다. 학교장으로 서신 정규오 목사님은 엄격하며 정확했다. 한치의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으신 어른은 조금 자유롭고 싶어하는 신세대 신학생들에게 있어 늘 무서운 분이셨다. 내가 학보사 기자로 일할 때의 일이다. 학교의 행사에 대해 조금 비판적인 기사가 게재되자 학보 지도교수는 안달을 했다. 이렇게 기사를 쓰면 어른이 노한다는 것이었다. 그분의 과잉충성(?) 때문에 나는 수양관에서 하룻밤을 묵고서야 아침 식탁에 정규오 목사님과 마주 앉았다.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된장국에 간소한 식탁에서 정목사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젊은 학생들 입장에서는 많은 말을 할 수 있겠네만, 문서로 표현해두면 고칠 수 없으니까 늘 다음을 생각하면서 글을 써야 한다네. 앞으로도 수고하게.”

엄청남 꾸지람을 기대했던 나는 기대 이상의 격려를 받았다. 때문에 교단 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정목사님과의 인터뷰를 비롯해 만남이 있을 때면 거침없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고, 궁금한 모든 것을 물을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 많은 실수와 시행착오 끝에 그분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면 그분이 기대하는 목표와 답이 보인다는 것도 발견했다.

정규오 목사님에게는 늘 정치 목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해방 후 조선신학교 51인 신앙동지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한국교회의 보수신앙운동을 시작했고, 1959년 에큐메니칼 운동에 반대하는 합동교단 설립을 주도했으며, 1979년에는 합동교단의 개혁을 외치며 교단개혁을 부르짖다 비주류 교단을 만들어낸 주동자라는 이유 때문이다. 언젠가 공석에서 목사님은 79년의 분열은 잘못이었다고 참회한 바 있으니 그분의 정치적 선택에는 일정부분 아쉬움이 보인다.

하지만 그분의 신앙적 가르침은 지금 한국장로교회들의 보수성을 지키는데 크게 공헌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정치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담임했던 광주중앙교회와 광신대학교를 현재의 모습으로 일궈냈으며, 많은 제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칼빈주의자들로 키워냈으니 그분의 정치성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견지해온 고집이요, 신앙이었으리라는 이해도 가능할 것이다.

나는 이 어른의 삶을 회고하면서 정치적 영향력보다 삶 속에 배인 청빈과 무소유의 모습을 기리고 싶다. 교단이 어려움을 당해 총회신학교를 복구해야 할 즈음이었으리라. 이 어른이 선 듯 5천만 원의 거금을 내놨다. 은퇴 후 외부활동을 끊은 한참 후의 일이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신년 대담을 진행하는 자리에서 물었다.

“목사님, 이렇게 큰돈은 어디서 났으며, 또 이렇게 바쳐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저기 내 내자가 병이 들어 저러고 있으니 나 죽으면 양로원에 보내려고 자녀들이 마련해 준 것이야. 내가 이런 것 모아두고 있으면 아무도 안 돌봐 주니까 안돼. 그래서 바친거야.”

나는 그 대답을 들으면서 은퇴 후 사재를 들여 마련한 헐몬수양관을 다시 중앙교회에 바쳤던 다음에 했던 대답을 떠올렸다. 그 때도 그랬다. “내가 이것 내 것으로 갖고 있으면 뭐하겠어. 교회가 필요할 때 써야지. 내가 이렇게 바쳐버리고 아무 것도 없으면 교회가 나를 책임져주지 않겠어?” 당시 정목사님과 가족들은 사재를 갖는 것에 대한 가족회의가 있었다고 알고 있다. 자녀들은 “우리가 중앙교회를 통해 교육을 받고 이렇게 성장했으나 하나님께 다 바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개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경공회를 통해 성경번역을 시작할 때는 먼저 퇴직금을 받아내 공회에 바쳤으며, 교단이나 신학교의 일을 위해 항상 앞서 비용을 내놓으셨다.

그분은 그렇게 사셨다. 소유에 대한 욕심을 가질만도 한데 소유하는 것보다 주님을 위해 쓰는 것을 더 기뻐하신 분이다. 부창부수라고 어디 그 어른뿐일까? 내 신학교 동기인 빛과소금교회 정종돈 목사의 전언도 흥미롭다. 정종돈 목사가 교회를 개척해 조금씩 부흥하고 있을 때였다. 벌써 십 수년 전의 일이다. 하루는 허름한 할머니 한 분이 교회로 찾아왔다. 그리고 정종돈 목사에게 말했다. “나는 헐몬수양관 정목사님 사모인데 여기 이 교회에 서울에서 와 사업에 실패하여 어려운 집사님이 계시는데 이것을 꼭 전달해 주시오. 그리고 이것은 소문내시지 말고.” 사모님은 정종돈 목사에게 100만원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정종돈 목사는 사모님이 지목하는 분을 금방 알아냈다. 그리고 그 돈을 전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업에 실패한 그 집사님은 기도원에 올라가 기도하다가 사모님과 만나 기도제목을 나누게 되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모님은 거금을 전달한 것이다. 그 후 그 집사님은 서울로 다시 가셨다. 정종돈 목사는 사모님께서 병을 얻어 기억이 흐릿해 졌을 때 이 사실을 내게 전해주었다. 그분들은 이렇게 사셨다. 소유에 대한 욕심없이 교단과 교회를 사랑하신 분들이다. 나는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 가족에게 정목사님이 남기신 유산이 있느냐고. 그분의 대답은 이랬다.

“사모나 자식을 위해 통장 하나 남기신 게 없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생각할 수 있지만 그분은 그렇게 사신 분이다.”

사람의 일생에 흠이 없는 이가 누구겠는가? 교단이라는 정치현장에서 구설수에 휘말리거나, 이따금 비난의 말을 듣지 않는 이가 누구겠는가? 단 하나님께 받은 은혜대로 정도를 걷는 게 더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정규오 목사님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총기를 잃지 않으심이 한없이 부러워 내 시집에 수록한 서시로 글을 맺는다.

“내게 단 한가지 소원을 말하라 한다면/죽는 날까지/맑게 사색할 수 있는 정신이다.//건강한 육신이 아니라도/많은 재화로 부요를 누리지 못하거나/뭇 사람의 관심과 명예를 갖지 못했다 하더라도/변화를 오감으로 느끼며 사색할 수 있는/맑은 정신만 있다면.//생각하며, 사랑하며, 사모하며 살아가는/생이라면 그것으로 족하리라.//복잡한 세상이 외롭게 해도/맑고 깨끗하며 정직하게 사색할 수 있는/영혼을 가졌다면.//홀로 있음으로 외롭고 쓸쓸한 시간이 오더라도/그의 고운 미소와/따뜻한 마음을 떠올릴 수만 있다면.//혼미하지 않는 정신으로/삶을 그리며, 기쁨을 얻게 하신 그분께 감사하며,/깊고 어두운 강 호젓이 건널 수 있다면/그것으로 더 이상 바랄 게 없으리라.”

고 정규오 목사님은 1914년 11월 14일 생으로 광주중앙교회를 담임하다 65세에 자진 조기은퇴했으며, 광신대학교를 설립했다. 또 조선신학교 51인 신앙동지회를 통해 한국에 칼빈주의 보수신학을 뿌리내리도록 하는데 힘썼으며, 1959년 합동교단 설립과 총회장을 지냈으며, 개혁교단을 중심으로 활동해 오다 지난해 합동측과 개혁측의 합동을 뒤에서 지지해왔다.

1993년부터는 성서공회가 낸 ‘표준새번역’의 오류를 지적하며 성경번역 운동에도 힘써오다 2006년 1월 19일 92세의 일기로 소천했다. 저서로는 ‘한국교회사’ 등 다수가 있으며 유족으로 문인순 사모가 있고, 자녀들은 목사, 교수, 법조인 등 지도급 사회인들로 활동중이다.

(뉴스파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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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획] 당신이 우리의 훈장입니다 (3)불굴의 지도자들

  • 기자명정재영 기자 jyjung@kidok.com
  •  
  • 입력 2021.04.27 23:03
  •  
  • 업데이트 2021.05.03 21:20
 
 

개혁주의 보수신앙 정체성 사수하며 교단과 교회 부흥 이끌다

 

 

정규오(丁奎五·1914∼2006)

‘바른 신앙, 넓은 시야의 지도자’ ‘아름다운 원칙주의자’로 표현되는 해원 정규오 목사의 업적은 크게 3가지 분야로 평가할 수 있다.

첫째, 신학과 신앙 분야 업적으로 ‘51인 신앙동지회’ 결성과 자유주의신학 퇴치운동을 들 수 있다, 조선신학교가 자유주의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그냥 묵과할 수 없었던 정규오는 정통신학을 사랑하는 51인 동지들을 규합하여 제3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진정서(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총회는 51인 학생들의 진정서가 이유 있다고 보고 조사위원을 내서 총회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을 타파하는 데 힘썼다. 또한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신앙동지회를 중심으로 1953년 7월 한국 NAE를 결성했다.

둘째, 교회 정치 및 행정 분야에서 가장 주목할 것이 ‘합동총회와 개혁총회의 재합동’에 있어서 중심역할을 한 일이다. 해원은 개혁총회가 합동총회로부터 분리하여 나온 26년 후 합동총회와 재합동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이것이 해원의 생전에 한국교회와 세계 교계에 귀감이 되는 마지막 공헌이다.

셋째, 교육 분야에서는 개혁주의 신학을 보수하기 위해 장로회신학교 설립에 공헌했다. 박형룡을 교장으로 하는 장로회신학교가 개교하는 데 학우회장 해원을 중심으로 한 학우들과 51인 신앙동지회가 주축을 이루었다. 또한 광신대학교를 설립하여 지역 특성에 맞는 인재를 양성하기도 했다.

발제자/김호욱 교수(광신대학교

 

https://blog.naver.com/kjyoun24/60118229017

김의환 총장이 밝힌 정규오 목사와의 '애증관계'

  • 기자명 김철영
  •  
  • 입력 2007.01.24 00:00
  •  
  • 댓글 0
 

'신복음주의자로 오해받아', '교단 합동에 대한 열망' 등 비사 털어놔

전남 영암 출신으로 대표적인 교회사학자인 전 총신대 총장을 역임한 김의환 칼빈대 총장(74세)이 해원 정규오 목사와의 30년 개인적 관계를 소상하게 털어놨다. ▲ 김의환 총장

 

김 총장은 22일 광주중앙교회에서 열린 해원 정규오 목사 추모 및 전기 출판 감사예배에 참석한 자리에서 호남의 보수지도자이자 2005년 교단 합동 이전까지 예장 개혁교단의 어른 역할을 감당했던 해원 정규오 목사와의 관계를 비교적 공개했다. 김 총장은 해원과의 만남을 한마디로 '애증의 관계'로 표현해 눈길을 끌었다.

김 총장과 해원 정규오 목사의 만남은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 총회의 명을 받아 최훈 목사, 정규오 목사 등과 함께 화란에서 열린 RES 대회에 참석했다. 그 대회 파일라이트인 자유대학 조직신학교수인 버커우 박사가 강연을 했는데 가톨릭 교회와의 일치를 제시했다. 그 때 정규오 목사가 RES 대회를 빨리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해 결국 그 다음 총회에서 탈퇴했다"며 해원의 정통 보수신학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김 총장은 또 자신에 대하 신복음주의자라고 규정한 해원과의 대화내용도 공개했다. "정 목사는 교단이 혼란을 겪을 때, 나를 신복음주의자로 지목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니오'라고 말할 기회가 없었다."며 서운한 관계로 변한 계기를 털어놨다. 김 총장은 "그런데 미국으로 떠나기 전 단둘이 긴 시간을 이야기했다. 그 때 미국 신학교의 동향을 이야기 하면서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은 괜찮지만 신학대학원은 성경무오도 안 믿고, 여성목사 안수에도 찬성하기 때문에 후배들을 그 신학교에 추천 할 수 없다'라고 했더니 정 목사가 '김 목사 고마워, 내가 오해했어'라고 하더라"며 소개했다.

김 총장은 이어 "정 목사가 귀국 후에 광신에서 특강을 요청하겠으니 꼭 와서 강의해 달라고 해서, 귀국 후에 광신에서 특강을 했다. 그 때 정 목사는 '김의환 목사는 신복음주의자가 아니다. 오해였다'고 소개해주시면서 믿어주시고 격찬해 주셨다."며 둘 사이의 관계가 회복된 계기를 소개했다.

"정 목사는 그 후에도 나를 광주중앙교회 부흥사경회 강사로 두 번이나 초청해주었다. 특히 두 번째 강사로 초청됐을 때는 정 목사가 사람의 등에 업혀 내 숙소로 직접 왔다. 그 때 변한규 목사와 셋이 있었는데, 녹음기를 놓고 나와 변 목사에게 교단 합동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고 소개했다.

"정 목사는 '나는 요즘 누워 있으면 주님이 물으실 질문을 생각하네.'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 왜 교회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하고 있느냐'라고 책망하시는 것 같네'라고 말씀하시면서 교단 합동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말씀하셨다"

깁 총장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 해원은 변한규 목사에게는 "자네가 서둘러"라고 말했고, 김의환 총장에게는 " '김 목사가 총장이니 두 교단이 신학적 이질감이 커지기 전에 개혁측과 합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게 정 목사와 나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소개했다. 해원이 1979년 교단 분열 이후 얼마 교단 합동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고 있었는지, 그리고 교단 분열에 대한 엄청난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사학자인 김 총장은 해원에 대해 "정규오 목사는 신학생 시절부터 신학의 정론을 따르기 원했고, 보수신학을 배우기 원하신 분으로 장로교와 총신의 모체적 역할을 감당했다"고 평가했다. 또 "개혁 총회를 합동총회와 합동하게 한 일, 광주숭일중고등학교를 노회산하 학교로 지킨 일, 광신대학교를 대신학교로 발전시킨 것, 광주중앙교회를 호남제일의 교회로 키운 점"을 높이 평가했다.

김 총장은 "애증관계도 있었지만, 중심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된 오늘이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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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 출생
정규오목사(丁奎五, 1914. 10. 14~2006. 1. 19)는 전라남도 나주군 다도면 방산리(용동)에서 정효순(丁孝純)씨와 강누동(姜樓洞)씨 사이에 5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이미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교회를 세우고 1907년 9월 18일엔 조선장로교 7인의 목사가 탄생했고, 목사 장로가 중심이 되어 노회(老會)가 형성되었고, 또 1912년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이 총회가 조직된지 2년째 되는 해인 1914년 장차 그 총회를 위해서 사역할 한 주의 종이 조선의 남쪽 끝 나주(羅州) 땅에서 태어났다.
나주는 공교롭게도 이 지역을 선교지로 위임받은 배유지(Rev.Bell Eugene 裵裕址)목사에 의해 선교가 이루어졌다. 배유지 선교사가 그토록 보수신학과 신앙을 위해 몸 바치고 헌신했던 그 땅에 앞으로 그 보수신학과 신앙을 위해 헌신할 한 사람을 태어나게 하심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었던 것을 누가 알았을까?
정규오가 태어난 1914년의 방산(芳山)지역은 이미 1896년(고종 33년)에 한반도에 13도 제도가 시행되어 전라도가 전북과 전남으로 나뉘어졌는데, 전라남도로 나누어진 1896년에 전남지방에 최초로 복음이 전래된 지역은 당시 전남의 행정중심지였던 나주였다. 그해 11월에 당시 평양 장로회신학교 조직신학교 교수였던 이눌서(Rev. Reynoles William. D)와 배유지 선교사는 함께 전남지역의 나주를 답사하고 복음을 전했다.

주일학교에서 선교사들로부터 교육받아
정규오는 어려서부터 주일학교를 다녔고 주일학교에서 철저한 보수주의 신앙훈련을 받았다. 당시 교회는 선교사들을 통해 겨울이나 여름휴가를 이용 성경을 집중연구하는 부흥사경회로 교인들에게 신·구약 성경을 가르치는데 치중하였다. 나아가 새벽기도회, 가정예배, 금요구역예배도 거의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정규오는 동내에 세워진 교회에서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한국인 목사 장로들을 통해서도 교육을 받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서도 배우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보수적인 가르침과 신앙교육은 후일 그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데 큰 힘이 되었고 원동력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가 교단의 신학적 입장을 누구보다도 확신있게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이때 갈고 다져진 철저한 주일학교 교육과 사경회를 통해 얻은 신앙적인 확신에서 였다고 하겠다.
정규오는 당시 방산교회 안에 사립 사설강습소가 있어서 2년동안 학습하였고, 후에는 다도면 판촌에 설립된 공립 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해 4년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이때 어린 정규오에게 평생을 좌우할 선물이 주어졌는데, 그 선물은 다름 아닌 책(冊)이었다. 당시 당산교회 송복순전도사님 남편 남복우씨가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많은 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많은 책들이 그에게 넘어왔다. 그는 이 책들을 통해 동서양의 지식과 사상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 책 중에는 일본에서 간행된 중학 강의록과 와세다대학 강의록이 있어 지식의 기초를 쌓았고, 엔사이구로베지아 일본대사상전집, 법학, 철학, 윤리학에 관한 서적과 칼 맑스가 쓴 자본론 전집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여러 이론 중에 맑스의 사상을 연구한 이유는 그의 생질 이민호와 이론투쟁에서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문학·법학·철학·신학 등 사상 섭렵
그는 1945년 9월 신학교에 진학하기 전부터 독학을 통해 여러 학문 세계를 접하면서 신학연구를 위한 인문소양의 지식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신학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은 이미 한 시대의 일꾼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예비단계로 미리 많은 책들을 통해 그의 사상기반을 다지신 것이었다고 하겠다.
특히 공산주의 이론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 생애의 큰 사명이기도 했다. 좌·우익 대결 속에 6·25라는 참상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잔학상과 허구를 직접 눈으로 체험한 자로써 공산주의로부터 기독교 복음을 변호할 책임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규오목사 생애 가운데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신학교에 입학 하기 전에 이미 박형용박사가 쓴 한국의 정통 기독교 변증서라고 할 수 있는 1935년판 <신학난제선평>(평양신학교 간행)을 만난 것이다. 이 책은 자유주의 신학사상들을 신신학으로부터 출발하여 당시 조선교회에서 유행하던 이사상에 이르기까지 열거하고 비평한 전 18장 850페이지에 달하는 변증서요, 급히 몰아치는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대한 경고를 시도한 신학서적이었다. 딱딱하고 어려운 학술서적이지만 그는 일본에서 나온 많은 사상서들을 읽은 경험이 있어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었고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접하게 된 사연이 있는데 그가 1934년 11월부터 1940년 초까지 광양진상금융조합 서기로 6년간 일할 때에 출석했던 당시 광동중앙교회 담임목사(김순배)로부터 서제에서 선물로 받았던 애장품이었는데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그 책의 저자 밑에 강의를 받게 된 것이다. 얼마나 깊이 있게 그 책을 열심히 읽었던지 그 책의 내용을 저자 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이 책만큼은 저자 박박사님보다 제가 신학난제선평을 더 잘 알고 있을런지 모른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청년 정규오가 박형룡박사의 책과 만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규오는 드디어 1945년 9월 서울에 있는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였다. 38선이 그어져 남북간의 통행이 막히게 되고 해방직전 일제에 의해 조선예수교장로회가 해산 당하고, 8·15 광복 직후 <남부총회>라는 이름으로 복구되었으나, 총회직영신학교로 자유주위 신학을 대변해 온 ‘조선신학교’가 김재준을 중심으로 일부 교수들이 선교사들이 전해 준 정통보수신학에 반(反)하는 성경관과 신학을 주장하며 가르치고 있었다. 그같은 자유주의 신학에 저항하여 투쟁함으로 장로교회의 정통보수신학을 지키고자 일어난 그룹이 바로 ‘51인 신앙동지회’였다.

51인 신앙동지회 규합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
당시 남부총회로부터 직영신학교로 인정받은 조선신학교가 자유주의로 기울어져가고 있는 현실을 묵과할 수 없었던 정규오는 정통보수신학을 사랑하는 동지 51인을 규합하여 1947년 4월 18일~22일에 대구제일교회당에서 개최되는 제33회 총회로 내려가 진정서를 제출, 총회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타파하고 그 주동자들을 축출하는데 앞장섰다. 그들의 진정서 안에는 (전문) 조선신학교에 와서 성경과 신학을 배울 때 우리는 우리의 유시(幼時)부터 가지고 오는 신앙과 성경관이 근본적으로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정규오 목사의 신앙관과 정통보수신학과 정의감이 얼마나 투절했던가를 엿볼 수 있다 하겠다.
여기서 잠시 정규오 목사와 박형룡 박사의 관계를 짚고 가자. 이미 정규오 목사는 박형룡 박사를 만나기전 그의 저서를 읽고 만난 점과, 해방 후 박형룡 박사는 10년여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목숨을 건 모험끝에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박박사는 고려신학교 초청도 있었지만 51인 신앙동지회 탄원서에 용기를 얻어 엘리야 선지자를 생각하면서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여 숙소(여관)에 머물러 있을 때 찾아간 51인 신앙동지회를 대표한 정규오 회장과 학생들에게 “학생들의 탄원서한이 없었던들 귀국의 결심이 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한국교회는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미칠 때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고 고백하였다(정규오 생애와 삶 p.34. 2011).
정규오 목사를 이야기 할 때는 W.C.C 반대 투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동지회는 1953년 7월 미국복음주희협회와 같은 소속인 한국복음주의협의회(N.A.E)를 조직했다. 이 세력은 대한예수교장로회 내에서 일정한 교권을 형성하면서 WCC에 대항하였다. 에큐메니칼운동은 세계교회들이 지향하고 있는 하나의 새로운 움직임이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WCC 1차 총회(1948)와 2차 총회(1955)에 대표를 파송하였는데, 이 WCC문제로 인해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1회 총회(1955), 42회 총회(1957) 43회 총회(1958)에서 양측이 충돌하고 말았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에큐메니칼연구위원을 선출하였는데 지지측에 한경직 전필순 유호준 안광국, 반대측에 박형룡 박병훈 황은균 정규오 였다. 이 두 그룹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반대에 박형룡 정규오였고, 지지측엔 한경직 유호준이었다.
이렇게 정규오 목사는 언제나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함께 갔고 오늘의 보수신학을 지키는 선구자로 남게 되었다. 1979년 대구 동부교회에서 개최된 제64회 총회시 이끌고 나갔던 개혁측을 자신이 죽기전 합동으로 환원시키고, 그는 2006년 1월 19일 주님의 품에 안기웠다.
그가 총회를 이끌었던 제50회 총회의 결의 안건들을 보면 ①교단지<기독신보>를 당국으로부터 인가받아 간행했고, ②교역자 사례비의 5%를 적립해 은급제도 시동을 걸었으며, ③총회신학교 신축건물을 기공했고, ④WCC와 NCC와 관계되는 단체와는 협력 않키로 결의를 했다.
김남식은 해원 정규오를 가르켜 <그는 우리 시대의 거목이었다>면서, 고 정규오 목사의 인간됨과 일생을 농축한 말로 쉼표를 찍었다(「해원 정규오목사」 새한기획 출판부 2007. 서울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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