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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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16
  • 영산강닷컴 정문찬기자
  • 승인 2023.12.07 0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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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신성인, 에 수록된 남평의병들 2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위기를 당하면 목숨을 바친다(見危授命), 자기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殺身成仁)”

위급하고 어려운 때를 만나서 목숨을 버리고 몸을 바치는 도리를 ‘절의(節義)’라고 한다.

임진전쟁 당시 조선 곳곳에서 의병들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국난 앞에서 신분과 지위를 뛰어넘어 다양한 계층들이 참여했던 것이다. 호남의 의병들을 기록한 책이 고정헌의 <호남절의록>이다. 이 책은 의병장 고경명의 7대 후손인 복암 고정헌이 1800년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편집한 책이다.

<호남절의록>에 남평의병은 34명이 수록되어 있다. 지난번 남평의병 중에서 15명을 소개했다. 이번에는 나머지 의병을 소개하기로 한다.

호남절의록(남평의병 수록)
호남절의록(남평의병 수록)

 

호남절의록에 나오는 남평 임진의병

2012년에 편찬된 <남평읍지>에 수록된 의병들이다.

# 김공간

1592년에 창의사 김천일을 따라 방략을 계획하며 도움을 주었고, 금령 전투에서 승리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1593년에 김천일을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여 치열하게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 이영근

고경명 의병장을 쫓아 금산 전투에 참여하였고, 최경회 의병장 막하에서 불화살을 쏘아 적을 많이 죽였다. 전주성이 함락되자 최경회 의병장과 같이 죽었다. 사실이 호남절의록에 실렸다.

# 노희상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 전투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창에 찔려 죽었다. 선무원종공훈에 기록되었다.

# 정현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 부대에 합류하여 “큰일을 구제할 수 있겠다”는 고경명에 칭송을 받았다. 사실이 절의록에 실렸고, 사림들이 풍산사에 추향하였다.

# 박응주

1592년에 의병을 모아 금산으로 달려가서 죽었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고, 사실의 절의록에 실렸다.

# 최후립

스스로 순국하기를 맹세하며 “나는 세록의 후예이다. 어찌 감히 적을 피하며 국란에 나가지 안니하랴” 라고 하였다. 아우 홍립과 금산으로 달려가서 일본군의 목을 많이 베었다.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사실이 절의록에 실렸다.

# 최신헌

1592년 창의하여 선조가 피난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김사계의 천거로 소모관이 되어 의병과 곡식을 모집하여 여산에 참여하였다. 감사 이시방의 천거로 부종사관으로 삼았다.

# 서진문

서정후와 창의하여 김천일 의병장 부대에서 종사하였고,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아버지 병환의 위독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 김몽서

창의서사로 김천일 의병장을 따라 진주에서 전사하였다. 충신으로 병조정랑을 추증 받았다.

# 안세침

1592년 의병을 일으켜 수사 이억기 부대에서 군공을 세웠다.

# 양철

어매장군(선조의 어가를 경호)으로 의병 격문을 보고 병사들과 곡식을 모아 오대결, 한응성과 같이 금산으로 달려갈 많은 군공을 세웠다. 금산성 수복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하였다. 사후에 선무원종공신과 호성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

진주성 전투도(남평의병 다수 전사)
진주성 전투도(남평의병 다수 전사)

 

# 손의충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한 것을 듣고 아우 세랑과 병사를 모아 김천일 의병장 부대에 참가하여 형제가 같이 순국하였다.

# 함상목

형을 따라 종사관이 되어 충무공 이순신 부대에서 힘써 싸우다가 형과 함께 죽었다.

# 최희수

수사 이억기 부대에 참여하여 바다에서 10여 척을 쳐서 깨뜨리는 전과를 올렸다. 해전에서 순국하였다. 선무이등훈에 기록되었다.

# 송목익

1592년 형 송격의 명령에 따라 의곡을 모아 조운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 서정원

1560년 나주 남평에서 태어났다. 임진전쟁이 일어나자 김천일 의병장 부대에서 종군하였고, 수원 고성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후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여 순절하였다.

# 홍심일

임진전쟁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집하고 곡식을 모아 배로 운반하는 일을 맡았다. 이때 분조록이 일어나자 승지 서소를 찾아가던 중 왜적을 만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조정에서 공을 인정하여 형조 참판으로 추증하였다.

# 최응룡·최영수

과거에 합격하여 초토사 고경명 의병자을 따랐다. 아들 영수와 가동을 거느리고 금산으로 달려가 작전 계획에 도움을 주고 일본군의 베어 죽였으나 적에게 창에 찔려서 죽었다. 아들 영수는 잡혀서 적의 칼에 죽었다. 부자가 원종공신록에 기록되었다.

# 정준일

1592년 고경명의 거의격문을 보고 가재를 모아 금산을 달려가다가 병으로 돌와왔다. 아들 현을 보내 병사를 이끌게 하였다. 전쟁에 패배하자 세상일에 뜻에 끊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공훈을 기록하며 품계를 올려 호군을 내렸고, 풍산사에 배향하였다.

금산전투(남평의병 전사)
금산전투(남평의병 전사)

 

금산전투, 진주성 전투의 주력 남평의병들

지금까지 <호남절의록>에 수록된 남평의병들을 살펴보았다.

남평의병들은 김천일 의병장 부대와 고경명 의병장 부대의 주력이었다. 임진전쟁이 일어나자 병사들을 모으고, 의곡을 모아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치열하게 싸웠다.

주지하다시피 김천일 의병장은 1592년 한양이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선조가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경명·박광옥·최경회 등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글을 보냈다. 이어 호남에서 가장 이른 5월 6일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6월 3일 한양 수복을 목표로 북으로 향했다. 수원의 독성산성에서 유격활동을 하다가 8월에 전라병사 최원의 관군과 함께 강화도로 거점을 옮기고, 강화부사·전라병사와 협력하여 연안에 방책을 쌓고 병선을 수리하는 등 전투를 준비했다.

이때 장례원판결사의 벼슬과 ‘창의사’라는 군호를 받았다. 그 뒤 조정과 호남·호서를 연결하는 전략상 요지인 강화도를 중심으로 양화도전투, 선유봉 및 사현전투, 행주산성전투 등에 참가하여 전과를 세웠다.

1593년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가 제기되었을 때 이를 반대했다. 그해 6월 2차 진주싸움에서 관군·의병의 지휘관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었다.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과 함께 항전했으나, 10일만에 달하는 일본군의 공세로 성이 함락되자 아들 상건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했다.

그리고 고경명 의병장은 1592년 한양이 함락되고 선조가 의주로 피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각처에서 도망쳐온 관군을 모았다. 아들 고종후·고인후로 하여금 이들을 인솔, 수원에서 일본군과 항전하고 있던 광주목사 정윤우에게 인계하도록 했다.

이어 전 나주부사 김천일, 전 정언 박광옥과 의논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에서 진용을 편성했다.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종사관에 유팽로·안영·양대박, 모량유사에 최상중·양사형·양희적을 각각 임명했다.

그리고 전라도 의병군의 결성과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양산숙·곽현과 함께 서해를 경유해 조정에 전달하도록 하고, 6월 1일 담양을 출발해 북상을 개시했다.

태인에서 의병군을 정윤우에게 관군을 인계하고 돌아온 고종후를 만나 그에게 다시 격문을 휴대하고 금구·임피 등지에서 병기와 군량을 수집하도록 했다. 또 제주목사 양대수에게 전투 말을 보내주도록 요청했다.

6월 13일 전주에 도착해 고인후에게 수백 명을 인솔하고 무주·진안 등의 요로에 복병을 배치해,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막도록 했다. 22일 전주에서 여산으로 옮겨 고종후·고인후와 합류하고, 다시 호서·경기·해서 지방에 창의구국의 격문을 발송했다.

27일 은진에서 도달해 황간·영동 등지에 있는 왜적이 금산을 점령하고 장차 전주를 경유하여 호남을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곡창인 호남을 일본군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당초의 북상 계획을 변경하여 7월 1일 연산으로 회군했다.

이곳에서 충청도 의병장 조헌에게 서신을 보내어 10일 형강을 건너 합세해 금산의 왜적을 공격할 것을 제의하여 9일 진산을 경유해 금산에 도착하였다. 방어사 곽영 관군과 좌·우익으로 진을 편성했다. 이날 의병 중에서 정예 수백 명을 거느리고 적의 본진을 공격했으나, 적의 굳센 저항과 관군의 소극적 태도로 퇴각하고 말았다.

10일 곽영과 합세해 800여 명의 정예로 선제공격을 했는데, 일본군이 먼저 약한 조선군을 일제히 공격했다. 이에 겁을 낸 조선군은 싸울 것을 포기하고 앞을 다투어 패주했고, 의병부대도 붕괴되고 말았다.

고경명은 후퇴해 다시 전세를 가다듬어 후일을 기약하자는 주위의 종용을 뿌리치고 “패전장으로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며 물밀듯이 밀려오는 일본군과 대항해 싸우다가 아들 고인후와 유팽로·안영 등과 더불어 순절했다.

이러한 김천일 의병 부대와 고경명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남평인들은 의병을 모으고, 군량을 모아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주력이었다. 그리고 금산전투에서, 진주정 전투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전사하였거나 순절하였다.

다행히 <호남절의록>에 남평의병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지만, 미처 기억하는 후세들은 많지 않다. 2012년 편찬된 <남평읍지>에 남평의 의병활동을 기록한 것은 잘한 일이다.

국난 앞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의로운 사람들. 견위수명, 살신성인의 삶을 살다간 의병들을 기억하는 것은 음습하고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불꽃이며, 자주와 독립정신의 씨앗이다.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소중한 정신이다.

미처 몰랐던 남평의병의 이름들을 불러본다. 죽을 줄 알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참여했던 의병들이 우리에게 묻는다.‘너희는 제대로 살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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