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12 ▶광주학생독립운동 주도한 이산 윤승현 애국지사
상태바
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12 ▶광주학생독립운동 주도한 이산 윤승현 애국지사
  • 영산강닷컴
  • 승인 2023.10.21 09: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주도한 이산 윤승현 애국지사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12

 

광주학생독립운동 주도한 이산 윤승현 애국지사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남평초등학교 안에 이산 윤승현 기적비가 서 있다. 바로 뒤에는 전라남도교육청 남평 공공도서관이 위치하고 있다. 이 기적비의 내력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가 알려주지 않으니 그냥 지나치고 만다.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학생항일운동으로 알려진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남평 출신으로 항일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했던 윤승현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 탓할 것인가?

 

이제라도 윤승현 애국지사의 활동과 그의 애국정신을 알려야 한다. 그래야 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을 제대로 알 수 있다. 모른다고 외면할 일이 아니라 행적을 찾아 드러내야 할 일이다. 미처 몰랐던 이산 윤승현 애국지사를 만나러 가자.

 

이산 윤승현 기적비(전남 나주시 남평읍)
이산 윤승현 기적비(전남 나주시 남평읍)

 

이산 윤승현 선생은 1910101일 남평면 남석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3.1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광주고보에 진학하여 19294월에 4학년으로 동맹휴학을 이대기와 함께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퇴학을 당하고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193112월 동지들을 규합하여 한국노동자농민조합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2년에는 전라남도 성진회 및 17개 항일단체를 통합하여 전남노동협의회를 결성하는데 주도하였으며, 활동 기관지인 전남노동자신문 학생 뉴스 및 3.1운동 격문을 발간하여 일제의 만행과 잔학상을 만천하에 폭로하여 학생독립운동의 기폭체 역할을 담당하였다.

윤승현 의사는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지하운동단체인 독서회를 조직하여 전국평의회 및 신간회 등과 연계하여 공복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광주지법에 징역 3년을 언도받자 항소하여 1935128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의 판결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옥 후 경기도 청평에서 숯을 굽는 한편 신탄잡지를 발간하면서 항일 투쟁을 계속 전개하였다. 1945815일 광복을 맞아 건국에 힘쓰다 6.25 전쟁으로 귀향하는 도중 구국의 일념으로 민심의 안정을 호소하다 41세의 나이로 희생되었다. 안타깝게도 혈육이 없이 죽음에 이르렀지만 조국광복에 목숨을 바친 그의 충혼은 빛나고 있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의사 이산 윤승현 기적비 안내문

 

이처럼 윤승현 의사를 기리는 기적비는 국가보훈부 현충시설로 관리되고 있다.

윤승현 선생은 1928년 광주고보 재학 시 동맹휴학을 전개하였으며, 1929년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에 농민과 학생을 중심으로 한 한국노동자농민조합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32년에는 성진회와 여러 항일단체를 통합하여 전남노동협의회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지하운동단체인 독서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출옥 후에도 항일투쟁을 계속한 공로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이후에 일제의 탄압은 민족말살정책으로 전환되었다. 독립운동은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은 비밀결사단체인 독서회를 중심으로 항일과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독서회는 단순히 책을 읽은 수준에서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훈련을 했던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 노동협의회를 만들어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주도면밀하게 학생항일운동을 탄압하였고, 또 주도하는 학생과 시민들은 감옥에 가두었던 것이다. 이산 윤승현 의사도 3년의 옥고를 치루었고, 그 이후에도 다양한 항일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혈육이 없고 기록이 제대로 없어 윤승현 의사의 행적을 온전하게 드러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늦게나마 애국장의 서훈을 받았고, 1989년에 기적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마다행, 만시지탄이다.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에 남평초등학교를 방문해서 기적비를 찾았다. 온갖 잡초들이 무성했고,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공사를 하고 나서 주변 정리가 엉성하였다. 옆에 있는 빙청각에는 쓰레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혼란스럽고 음습한 시국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씁쓸했다.

여름 끝자락 다시한번 들렀더니 다행스럽게 제초 작업을 했고, 주변의 쓰레기는 치워져 있었다. 누군가 관심을 갖으니 주변의 정리되었던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평생을 조국 독립과 민족정기를 지키고자 했던 애국지사들의 삶과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되어야 한다. 그리고 남평이 낳은 이산 윤승현 선생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