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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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11
  • 영산강닷컴 정문찬기자
  • 승인 2023.09.2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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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한말의병 돌격대 선봉장 남평 최종익 의병장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어느새 가을이다. 폭염과 장마는 사람들을 지치게 했다.

무엇보다 어수선한 시국은 혼란과 불안을 안겨주고 있다. 특히 악성민원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교사들의 죽음이 연이어졌다.

더 이상의 죽음을 막고, 교권이 제대로 보장해야 한다는 절절한 외침이 주말이면 열리고 있다. 급기야 여야 합의로 교권 4법이 개정되어 통과되었다.

그러나 교사들은 아동학대 처벌법의 개정을 외치고 있다.

교권이 보장되고, 교육 활동이 정상화되어 갈등과 대립의 교육에서 상생과 협력의 교육의 공간으로 변화해야 한다.

아울러 한반도의 국제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한말의 기울어가는 시대적 상황이 오버랩될 정도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

가장 시급한 문제가 후쿠시마 핵폐수 투기 문제이다. 정부는 문제가 없다고 강변하며,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고 있다.

하여, 후쿠시마 핵 폐수는 방류하고 있다. 참으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풍전등화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의연하게 일어섰던 남도의 한말의병을 기억하는 것은 민족정기와 시대정신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남도의 한말의병 돌격대 선봉장 역할을 담당했던 최종익 의병장을 만나러 가자. 최종익 의병장은 식산과 영산강 사이에 자리잡은 도래마을에서 활동했다.

명당으로 큰 인물을 배출한 곳이며, 지금은 한옥마을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곳이다.

의병 활동에서 선봉장으로 나서다

다도면 도래마을(전남 나주시 다도면)

 

최종익 의병장(1878~1909)은 1878년 다도면 풍산리 도래에서 태어났다.

자는 우평, 호는 후괴이다. 그의 조상은 임진왜란 공신으로 김제군수를 지낸 최시망이다.

기우만의 제자로서 그의 학풍을 이어받아 위정척사론를 바탕으로 의병활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말 동향인 홍승용 의병장과 더불어 격문을 곳곳에 보냈다.

2백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막강한 부대를 편성하고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강진‧해남‧장흥‧영암 등을 주요 무대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2월 심남일 의병장의 선봉장인 강무경이 찾아와 일본군의 강력한 진압작전에 맞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고자 연합작전을 제안하였다.

이에 최종익 의병장은 심남일 의병부대의 후군대장으로 편성되어 활약하였다.

양벽정(전남 나주시 다도면)
양벽정(전남 나주시 다도면)

 

1908년 4월 강진 오치동 전투에서 일본군 십여명을 사살하고 이어서 장흥 곽암, 남평 장담원 전투에서 수십명을 사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7월에는 영암 사촌에서 헌병대장 고도히라야마 이하 기병 10여 명을 죽이거나 상해를 입혔다.

심남일 의병부대와 뛰어난 연합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최종익 의병장은 1908년 7월 봉황면 철야로 이동하였다.

전남의 서부지역을 주요 무대로 하였지만 전남에서 가장 요충지인 나주를 지키고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1908년 8월 나주 반치에서 이구마 영암 수비대와 싸워 20여명의 적을 사상하고 많은 무기를 빼앗았다.

다시 강무경 의병장과 연합하여 장흥 신풍에서 적 20여 명을 사상하고, 10월에는 해남 성내 작전에서도 정예병 3백으로 적 백여 명을 사상하였다.

이와 같이 최종익 의병장이 독자적 활동과 연합 활동을 동시에 펼친 것은 일본군의 강력한 진압 작전에 맞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호남의병들의 죽음을 불사한 활동과 소규모 유격전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이에 1908년 말부터 화력과 병력을 보강하고 친일 세력을 이용한 의병 색출 등의 작전을 펼치게 된다.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에 대항하기 위해 의병 부대 간의 연합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1908년 10월 능주 돌정리에서 잠시 쉬어가며 음식을 나누어 먹던 도중 일본 헌병 3백여 명이 기습을 해왔다.

이에 최종익 의병장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어리석은 오랑캐들아, 그리고 헌병 보조원들아, 네놈들은 천벌을 아느냐, 아니면 의병을 아느냐? 나는 오늘 너희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가장 선두에서 돌격하여 그 용맹함을 드러낸 최종익 의병장이었지만,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었다.

일본 헌병들의 사격과 동시에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한 놈이라도 더 죽이겠다고 앞서서 나아갔다.

하지만 큰 부상을 입은 최종익 의병장은 회복하지 못하고 출혈 과다로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심남일 의병장은 병석에 누워있었음에도 한달음에 달려와 현장에서 통곡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의병들이 최종익 의병장의 열정과 모든 전투에서 자신의 희생하며 돌격하는 모습에 경의를 표하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해방 후 최종익 의병장의 높은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남평에 위패를 설치하고 배향하였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정부에서는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흔들리지 말고 제대로 나아가야 하리라

어지러운 세상에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을 안정할 수 있는 곳은 고향과 집이다. 영산강의 한 줄기를 담당하는 남평 드들강. 그리고 식산과 월현대산은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마음에 안정을 준다.

이천년역사문화도시 나주의 한 축을 담당하는 남평은 많은 의병들을 배출한 곳이다.

임진의병에서 한말의병까지 국난 앞에 의연하게 일어섰던 남평의 의병장들. 그런데 정작 알려진 의병장들은 많지 않다.

역사를 전공하고 역사교사로 수십 년을 살아온 필자에게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았고, 또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남도민주평화길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왜 몰랐을까. 왜 말하지 못했을까, 왜 알리지 않았을까’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했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으니 알려 하지 않고, 배우지 않아도 되었고, 가르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현재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는 중앙사 중심으로 왕이나 중요 인물 중심의 명망가로 서술되어 있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의 역사나 인물은 거의 배우지 못하는 실정이다.

지금도 역사교육과정은 중앙 중심과 중요 인물의 역사로 서술되어 있어, 현장역사교육은 시대정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지역화 교육과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깨어있는 역사교육학자들의 노력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최근에 2022교육과정에 따른 논란을 뒤로 하고 정부는 확정 고시를 했다. 교육과정은 현장 교육의 절차와 내용을 규정하는 중요한 규정이다.

그래서 전문가와 관련 학자와 교사들의 토론과 협의, 그리고 공개적인 포럼과 세미나를 통한 과정을 거친다.

당연히 교육철학과 비전을 담보해야 하고, 미래 세대인 학생들의 삶과 직결할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무엇보다 올바른 역사의식과 민족정의를 바로 세워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공동체 사회를 만들어가는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것이 역사교육의 목적이다. 거기에는 국난 앞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연하게 일어선 의병들의 삶과 정신은 반영되어야 한다.

차디찬 풍찬노숙을 이겨내며 ‘대체 우리에게 조국은 무엇입니까?’

외친 진정한 영웅 의병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야 할 때이다.

바로 남평을 중심으로 활동한 최종익 의병장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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