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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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정의의 고장, 남평이야기 - 5
  • 영산강닷컴 정문찬기자
  • 승인 2023.07.24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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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의 유교 문화 ‘봉산서원과 장연서원’

김남철(나주역사교육연구회장)

 

서원은 조선 시대의 유학 교육기관으로 지방에서 유학 교육을 통해 지식인을 양성하는 곳이며,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를 가지고 있었으며 엄격한 학규에 의해 운영되는 특징을 가졌다.

서원은 존현과 강학이라는 기능에 따라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사당, 교육을 담당하는 공간인 강당, 유생들이 공부하며 숙식하는 공간인 동재·서재로 크게 나누어진다. 그 외에도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 이를 보관하는 서고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서원은 지방사림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나아가 중앙 정치세력의 제지 기반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사액서원은 편액뿐만 아니라 서원의 유지 관리를 위한 토지와 노비, 다량의 서적이 부수되는 것이었다. 이는 서원이 단순한 사설 교육기구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공인으로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원은 선조 때에 들어와 사림파가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시대가 내려오면서 서원이 사회적 위세를 지니게 되자 면세를 목적으로 납입되는 토지, 면역을 목적으로 투탁하는 양인이 많아져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초기의 서원은 대체로 그 건립이나 운영에 있어 향촌자치적 성격이 강했다. 인재를 키우고 향현을 제사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하고 사림의 공론을 형성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대립의식이 치열해지면서 서원의 설립에 중앙 권력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현상은 숙종 시대에 이르러 더욱 심해져서 각지에 서원이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사액서원의 경우 부속된 토지의 면세와 그 증가로 국고 수입이 감소했고, 서원이 군역을 기피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서원세력을 형성하여 지방 관리를 좌우하기도 하였고, 서원을 중심으로 붕당에 가담하여 당정에 빠져 향교의 쇠퇴를 가속시키는 폐단이 심해졌다.

그러다 고종1년(1864)에 대원군에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이 철폐되었고, 설치를 금지하였다.

남평에는 봉산서원과 장연서원이 있다. 먼저 봉산서원을 알아보자.

남평현감 청백리 휴암 백인걸을 모신 봉산서원

백인걸 휴암집

 

봉산서원(蓬山書院)은 남평읍 서산리 서원마을에 위치한다. 봉산서원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휴암 백인걸(1497~1579)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백인걸 선생은 1514년(중종 36) 남평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후학을 양성하며 유풍을 진작시켰다.

 

본관은 수원. 자는 사위, 호는 휴암. 왕자사부 익견의 아들이다. 조광조 아래에서 사림계 인물들과 교유하며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금강산에서 은거했다. 1537년 식년문과에 급제했으나, 기묘사림의 일파라는 이유로 성균관에 오래 있다가 예문관검열·예조좌랑·남평현감 등을 역임했다.

 

1545년 인종이 즉위해 사림을 등용하자 지평·호조정랑을 거쳐 헌납이 되었다. 그러나 이해에 인종이 죽고 나이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실권을 잡고 인종을 받들던 사림세력을 몰아내려고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며, 1547년에는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551년 풀려나 고향으로 가서 학문연구에만 몰두하다가, 1565년 문정왕후가 죽고 사림세력이 대두하자 승문원교리로 등용되었다.

선조가 16세에 즉위해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이듬해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상소를 해 수렴청정을 철폐시켰다. 그뒤 대사헌이 되어 권신들의 비위를 논핵하다가 사임했다.

1579년(선조 12) 지중추부사가 되었는데, 당시 사림관료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자 이이와 함께 붕당이 나라를 망칠 것이라 하며 조화를 이룰 것을 주장했고, 또한 군비강화를 강조했다. 동지춘추관으로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했으며, 청백리로 뽑히기도 했다. 저서로는〈휴암집〉을 남겼다.

청백리로 뽑혔던 백인걸 현감과 그를 배향하는 봉산서원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남평 현감으로 치적이 전국에서 제일이 되었을 정도로 발전을 시켰던 백인걸. 그런데 찾아오는 이 없는 봉산서원은 쇠락해가고 있다. 이제라도 봉산서원과 청백리 백인걸의 삶을 조명하고 문향 가득한 남평을 만들어가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남평 문씨의 시원 장연서원

장연서원(전남 나주시 남평읍)

장연서원(長淵書院)은 남평읍 풍림리 원적마을에 위치한다. 남평문씨의 시조인 무성공 문다성을 비롯하여 문공유, 문극겸, 문유필, 문익점 등 고려시대 남평문씨 인물 5인을 제향하고 있다.

장연서원은 입구인 홍살문을 지나면 서원의 담장을 따라 오선생기적비, 장연서원창건기념비, 광산군화수회비 등이 있고, 서원의 정문인 빙호루가 있다. 그리고 내삼문인 양춘문을 지나면 동제인 악강당과 오사제가 있고, 건너편에 서제가 있다. 경내 중앙에 상덕사가 있고, 문익점의 영정이 있는 영당이 있다.

장연서원은 1734년(영조 10)에 창건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871년(고종 8)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된 뒤 1923년부터 전반적으로 다시 세워지기 시작하여 규모를 일신하였고 1975년 대대적인 중개수를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 장연서원 새로운 건물을 세워 자료전시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장연서원 주변에는 장자못이 있고, 그 뒤로 문암바위가 있다. 남평 문씨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다.

남평문씨 문익점 기념우표

 

남평 문씨 인물 중에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문익점이다. 문익점은 고려 말 사신을 봉행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하면서 목면 씨앗을 가져온 분이다. 그가 가져온 목면 씨앗이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에 보급된 목면은 농가 경제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고, 의생활을 비롯한 생활문화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목면 재배가 초래한 여러 가지 국가적 공헌은 후대에 이를수록 더욱 높이 평가를 받아 조선 영조 왕은 문익점의 후손에게 거듭 특전을 내리면서 "우리나라가 3백 년 전 이래 의관문물이 빛나게 일신된 것은 실로 문익점이 목면 씨를 가져옴에서 비롯된 것이니, 공(功)이 강성군 보다 클 수 없고 덕(德)이 강성군보다 훌륭할 수 없다." 라고 극찬했다.

​문익점은 목면의 전래자로서 만이 아니라 도학의 창명과 덕행, 충절 때문으로도 당대 및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김종직을 비롯한 정여창, 김굉필, 조식, 이황 등 영남 유학의 거목들이 목면 보급에 관한 그의 공적을 찬양하고 그의 도학과 덕행, 충절을 칭송하는 시문을 남겼다.

남평 문씨 현대 인물로는 문재인 대통령이다. 대통령 후보 시절 직접 장연서원에 방문하여 선조들에게 제향을 올렸고, 그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비록 집안사의 일이기도 하지만, 남평 지역에서 남평 문씨들의 활동은 지역 발전에 기여한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남평의 유교 문화는 남평향교와 봉산서원, 장연서원이 위치하여 남평의 학문과 문화를 선도하는 공간으로서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 외에도 곳곳에 정려가 있다.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바뀐다 할지라도 법고창신, 온고지신의 역사는 이어져야 한다. 남도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남평은 다시 부활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선비문화의 정신과 철학, 인문, 예술을 담아 새 시대에 맞는 남평의 품격에 어울리는 문화를 만들어 가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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