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시 남평읍 동사리1구 호족 [豪族] 호장 ( 戶長) 마을 당산제 남근석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주민들의소망 을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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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시 남평읍 동사리1구 호족 [豪族] 호장 ( 戶長) 마을 당산제 남근석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주민들의소망 을담고있다
  • 영산강닷컴 정문찬기자
  • 승인 2023.02.03 0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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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리 당산제 고싸움 나주정씨 호족 [豪族] 호장 ( 戶長)권위 [authority, 權威, Autorität] 여흥이였다-
-나주시 남평읍 동사리 나주정씨 호장 호족 마을 -
-자료 정문찬소장자료 나주시 문화제지정 자료등 -
-정문찬소장 자료257점중 33점 나주시문화제지정 남평호족 호장이 남평읍 동사리1구 거주하다-
나주시 남평읍 동사리 입구에 당산목과 나란히 세워져 있는 남근석 역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민들의 소망을 담고 있다고 하며,
주민들은 마을의 무사 안녕과 국태민안을 빌며 매년 정월 초사흘 꼬박꼬박 당산제를 봉행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마을지킴이로 250여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이 남근석은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딸만 낳은 사람들에게 영험하다 소문이 나서
요즘에도 주변마을이나 도시민, 무속인들이 간혹 찾아 떡시루를 차리고 지성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2m크기의 남근석 위에는 짚으로 만든 뚜껑을 씌우는데 이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자들의 바람기를 막기 위함이며,
만약 뚜껑이 사라지면 아낙네들은 남자들이 바람을 피울 것이라고 합니다  

 

 

 

 

전남 나주시 남평읍 동사리1구 는 나주정씨 호장 호족 집성촌이며 고사움놀리 당산제등

남평읍 동사리1구 입구에 당산목과 나란히 세워져 있는 남근석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민들의 소망을 담고 있다고 한다.


자연의 불확실성과 인간들의 삶. 조상들은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예로부터 나무와 돌 등 자연 땅 위 물체에 강한 신앙을 담아냈다. 이는 결국 불리한 환경을 보완하는 수구 막이 같은 형식으로 마을의 평화를 지켜주고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주민들은 마을의 무사 안녕과 국태민안을 빌며 매년 정월 초사흘 꼬박꼬박 당산제를 봉행 한다고 한다.


마을 지킴이로 250여 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이 남근석은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딸만 낳은 사람들에게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 요즘에도 주변 마을이나 도시민, 무속인들이 간혹 찾아 떡시루를 차리고 지성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2m 크기의 남근석 위에는 짚으로 만든 ‘덩(뚜껑)’을 씌우는데 이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낙네들의 바람기를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만약 뚜껑이 사라지면 아낙네들이 바람을 피울 것이라고 믿는다.


남근석은 여전히 민중들의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천 년의 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현대화의 조류에 밀려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호장

 

[ 戶長 ]

이칭별칭 호정
유형 제도
시대 고려
성격 관직
시행일시 고려시대
폐지일시 조선시대

목차

  1. 정의
  2. 개설
  3. 내용 및 변천

정의

고려·조선 시대 향리직(鄕吏職)의 우두머리.

개설

부호장(副戶長)과 더불어 호장층을 형성, 해당 고을의 모든 향리들이 수행하던 말단 실무행정을 총괄하였다.

내용 및 변천

나말여초 지방호족들이 조직했던 지방 관반(官班) 최고위직인 당대등(堂大等)을, 983년(성종 2) 이직(吏職)개혁에 따라 호장으로 개편하였다. 이때부터 지방에서 토호적(土豪的) 성격을 띠고 독자 세력을 유지하던 호장세력은 중앙의 집권화정책에 따라 독자성을 상실하고 지방통치체제에 흡수되어 지방관의 사용인이 되었다. 반면,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직접 모든 행정공무를 집행하였다.

1018년(현종 9) 향리의 정원제가 마련되면서,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경우는 1천정(丁) 이상에 8인, 5백정 이상은 7인, 3백정 이상은 5인, 1백정 이하는 4인이었고, 동서제방어사(東西諸防禦使)·진장(鎭將) 지역의 경우는 1천정 이상에 6인, 1백정 이상은 4인, 1백정 이하는 2인이었다. 이러한 복수 호장제는 지방의 특정세력이나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로 파악된다.

또 같은 해에 향리의 공복제(公服制)가 마련되었는데, 호장은 자삼(紫衫)에 화(靴)·홀(笏)을 그 내용으로 하였다. 그리고 호장을 임명할 때는 해당 지방관이 호장을 추천, 상서성(尙書省)에 보고해 승인, 급첩(給貼)하도록 하였다. 이어 1051년(문종 5) 향리의 승진규정에 따른 9단계의 서열이 정해지자, 호장은 그 최고위직이 되었다.

한편, 호장에는 섭호장(攝戶長)·권지호장(權知戶長)·상호장(上戶長)·수호장(首戶長)·안일호장(安逸戶長)·정조호장(正朝戶長) 등이 있어 그 임무를 분담하였다. 섭호장은 권지호장과 흡사해 단지 제반 지방사무를 섭행했던 것으로만 파악된다.

상호장은 고려 의종 이전에 중앙집권화정책이 강화되면서 다수의 호장들을 포함한 향리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필요에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상호장은 읍사(邑司)를 구성해 인신(印信)을 가지고 공무를 집행했고, 부정행위가 있을 때는 호장인(戶長印)을 받을 수가 없었으며, 일명 수호장이라 하였다. 호장인신은 해당 고을에 명령을 발하는 권한을 말하며, 지방관이 없는 지역에서는 관인(官印)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안일호장은 나이 70세에 이른 퇴역 호장으로 998년(목종 1)에 시행되었다. 정조호장은 세수(歲首)에 예궐숙배(詣闕肅拜)하는 직무에서 연원된 것으로 국가의 경조사 때에 군현을 대표해 상경숙배했으며, 상계리(上計吏)의 구실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호장은 호구장적(戶口帳籍)의 관장 및 전조(田租)·공부(貢賦)의 징수 상납, 역역(力役)을 동원하는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 외에 무적 기반(武的基盤)을 배경으로 호족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궁과(弓科)로 시험해 주현일품군(州縣一品軍)의 별장에 임명되는 등 지방군사조직의 장교가 되어 주현군을 통솔하기도 하였다.

호장가계(戶長家系)는 대체로 직이 세습되었고, 같은 신분간에 통혼(通婚)이 이루어졌다. 또한, 자손에게는 지방교육의 기회와 더불어 과거의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이를 통한 중앙관료진출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고려 후기에 호장층들은 무반직·기술직·잡과(雜科)와 첨설직(添設職)·동정직(同正職) 등 비실직(非實職) 품관직에 나아가 점차 신분상승을 꾀했으며, 조선시대 양반계층을 구성하는 주요 세력층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의 법전체제에 따라 호장층은 중인층(中人層)으로 신분이 고정되어 신분상승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자기도태현상을 낳았다. 단지 향리직의 수장(首長)으로서 조문기관(詔文記官)·장교 등과 같이 삼반체제(三班體制)를 유지해 아전으로서 지방관의 제반업무를 보좌하였다. →향리(鄕吏)

 호장 [戶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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