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남평 읍치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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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남평 읍치시설
  • 영산강닷컴 정문찬기자
  • 승인 2023.01.1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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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조선시대 남평 읍치시설
1. 남평현 역사

1. 남평현 역사 남평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지리지 武州조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

내용을 살펴보면, 무주가 관할하는 3개현 중 ‘현웅현은 백제 때 미동부리현이였고 경덕왕때 지금의 남평군으로 고쳤다(玄 雄縣, 夲百濟未冬夫里縣, 景徳王攺名 今 南平郡)’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남평은 통일 신라시대 경덕왕 때 현웅현으로 개명하기까지 미동부리현으로 불려진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기록은 고려사 지리지 나주목條에서 확인되는데, ‘남평군(영평군이라고도 한다)은 본래 백제 미동부리현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 현웅으로 고치고, 무주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에 와 서 다시 지금 이름으로 바꾸고, 나주목에 속하게 하였다.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고, 공양 왕 2년(1390)에 화순감무와 겸임하게 하였다(南平郡(一云 永平郡) 本百濟 未冬夫里縣. 新羅 景德 王 改名 玄雄 爲武州領縣. 高麗 更今名 來屬. 明宗二年 置監務 恭讓王二年 以和順監務 來兼)’고 쓰여있다. 감무 파견은 예종 원년(1106년)에 시작되었으며 이로 인해 主縣과 屬縣체제가 발생하 였다. 이 당시 중앙집권체제에 의한 통치권의 범위가 점차 지방으로 확대되면서 중앙의 관원을 파견하지 못했던 속군현에 감무를 파견하였는데, 남평에는 명종 2년(1172년)에 처음으로 감무가 파견되었고 공양왕 2년(1390)에는 화순현의 감무가 남평현까지 관할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 남평현에 대한 첫 기록은 『태종실록』30권, 태종 15년(1415년) 8월 10일 갑술 기사에서 확인된다.

능성현 지역인 철야현을 남평현에 병합하고, 태인현의 치소를 거산역으로 옮기고, 장사현의 치 소를 무송현으로 옮겼으니, 이는 도관찰사 박습의 계문에 따른 것이다(幷綾城縣任內鐵冶縣于南平 縣, 移泰仁縣治於居山驛; 長沙縣治於茂松縣, 從都觀察使朴習之啓也). 이 당시 철야현이 남평의 속현에 된 것에 대해서는 다음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확인된 다.

남평현은 본래 백제의 미동부리현이었는데, 신라에서 현웅현으로 고쳤다(영평군이라고도 한 다). 무주의 속현이었으나, 고려때 남평현으로 고치고 나주에 속하게 하였다. 명종 2년 임진에 감 무를 두었다가, 공양왕 2년 경오에 화순과 감무를 겸하게 하였으나(명 태조 홍무 23년), 본조 태조 3년에 다시 두 현으로 나누었다.

옛속현은 철야현 1곳이다. 철야(鐵冶)는 본래 백제 실어산현이었 는데, 신라 때 철야현으로 고쳐서 나주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소(所)는 운곡 1곳이고, 부곡(部曲)은 도민 1곳이다(철야·운곡·도민은 본래 능성의 속현이었으나, 본조 태 종 15년 을미에 부근에 위치한다고 하여 속현으로 하였다). 南平縣: 本百濟 未冬夫里縣, 新羅改玄雄縣, 【一云永平郡。】 爲武州屬縣, 高麗改南平縣, 屬羅 州任內。 明宗二年壬辰, 置監務。 恭讓王二年庚午, 以和順兼監務, 【大明 太祖 洪武二十三年。】 本朝太祖三年, 復分爲二縣。 古屬縣一, 鐵冶, 本百濟 實於山縣, 新羅改鐵冶縣, 爲羅州領縣, 高麗因 之。 所一, 雲谷; 部曲一, 道民。 【鐵冶、雲谷、道民, 本綾城屬縣, 本朝太宗十五年乙未, 以附近來 屬。】

『세종실록』「지리지」 나주목조를 보면, 남평현은 나주 계수관에 속해있던 3개군 8개현 중 하나로, 태조 3년(1394)에 화순과 남평을 겸하였던 감무를 남평에 별도로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태종 13년(1413)에는 감무를 현감으로 바꾸고1), 태종 15년(1415)에 능성현에 속해 있던 철야현 (현 봉황면)을 남평현에 병합시켰다.

이후 영조대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기록을 정리해보면 남평현에는 12개면이 속해 있었으며, 정조대의 『호구총수』를 보면 전체 12개면 119개리가 남평 현에 속해있음을 알 수 있다.

2) 이후 고종 32년(1895) 전국 행정구역을 23부제로 개편하면서 나주부 관할 하의 남평군이 되었 고, 그 이듬해인 1896년 8월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실시된 지방제도 개편에 의해 23부제가 13도제 로 개편되면서 남평군은 각 도의 하위편제 중 3등군이 되었다.

3) 그리고 1914년 4월 새로운 지방 행정구역 개편 방침에 따라 남평군은 동촌면과 군내면, 그리고 저포면을 통합하여 남평면이라고 하고 나주군에 소속되었으며, 1995년 1월에 나주시 남평면이 되었다가 같은 해 3월 나주시 남평 읍이 되었다.

2. 조선시대 남평 읍치 1) 조선시대 읍치 읍치란 조선시대에 지방관이 파견된 각 행정구역에 지방통치를 위한 행정․군사․교육․제사시설 등 을 일컫는 말로, 조선 초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위한 지방행정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4) 이를 기능별로 나눠보면 행정통치시설, 교육시설, 제사시설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태종실록』권26 태종 13년(1413) 10월 15일 기사. 『신증동국여지승람』권36 전라도 남평현.

2) 남평읍지편찬위원회, 2012, 『남평읍지』.

3) 칙령 제36호로 반포된 지방제도 개정안에 의해 전국은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평안북도, 평안남 도, 함경북도, 함경남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13도로 개편 되었으며 그 하위에 7부1목339군을 두었다.

이 중 339개군은 1등군부터 5등군으로 나누었으며, 이 개편에 의해 남평은 3등군이 되었다.

4) 이수진, 2019, 「조선시대 읍성 연구」, 목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다. 이 중 행정통치시설로는 객사, 아사, 향청, 그리고 육방, 창고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중 가 장 중심이 되는 시설은 객사와 아사, 그리고 향청이라고 할 수 있다.

5) 객사는 삼국시대 이래 사 신의 숙소 및 접대 장소로 활용되었으나 조선이 개국되면서 왕을 상징하는 유교적 시설로 자리잡 게 되었고, 조선 초 읍치시설의 정비에 따라 획일적으로 전국에 확산․건립되어 갔다.

6) 특히 객사 정청은 국왕 앞에서 해야 할 모든 의례를 행하는 장소로, 지방통치가 국왕에 의해 직접 이루어지 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조성된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7) 아사는 상징적인 의미의 객사와는 달 리, 지방통치의 실무를 행하는 시설로, 공아 또는 동헌 등으로 불렸다. 객사 보다는 낮은 위계를 갖고 있지만, 지방의 수령이 집무를 하는 장소로 객사와 같이 별도의 담장을 갖추고 있다.

이 담 장 안에는 수령의 집무처 외에도 식솔들이 거주하는 내아 등의 건물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이처 럼 조선 건국 이후 조성된 객사나 아사는 국왕에 의한 직접 통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권위와 위엄을 갖춘 모습으로 정비되었으며, 이에 따라 읍치는 기능뿐만 아니라 경관적으로도 주변과는 구별되는 차별성을 갖추게 되었다.

8) 이외에도 기타 행정시설들이 고을의 규모나 지역 특성에 따 라 다양하게 설치되었다.

9) 향청은 지방의 수령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이다. 留鄕所, 申明 色, 分京在所, 鄕射堂, 鄕社堂, 鄕序堂, 鄕堂, 留鄕廳, 風憲堂, 時所廳, 會老堂, 鄕所廳, 鄕廳 등의 명칭으로 다양하게 불렸고, 조선 후기에는 동헌 다음의 두 번째 관아라는 뜻으로 貳衙라 불 리기도 하였으나, 대체적으로 전기에는 유향소, 후기에는 향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고 각종 지 리지에는 대부분 鄕射堂으로 기록되었다.

10) 읍치의 교육시설로는 향교가 있다. 향교는 국가 통치의 사상적 근간이 되는 유교를 널리 보급 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되었으며, 결국 지방을 획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 다.11) 府와 牧에는 無祿官인 교수(종6품)를, 군․현에는 훈도(종9품)를 파견하여 교육의 중앙집권 화를 꾀하였으며, 공자와 유현들을 모시는 문묘를 두어 왕권강화의 적극적인 수단으로 활용하였 다.

12) 향교 내에 설치된 문묘 이외의 제사시설로는 사직단, 성황단(사), 여단을 들 수 있다. 사 직은 토지의 신인 社와 곡식의 신인 稷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사직단은 이에 대해 제를 올리는 시설을 말한다. 그리고 여단은 불행한 죽음을 당하거나 주인 없는 혼령을 대상으로 제를 올리는 시설이며, 성황단(사)은 고을의 수호신을 대상으로 제를 올리는 시설이다.

13) 5) 이수진 2019, 위 글. 6) 여상진, 2005, 「조선시대 객사의 영건과 성격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청구논문.

7) 김헌규, 2007, 「조선시대 지방도시 읍치의 성립과 계획원리에 관한 연구」『건축역사연구』제16 권 2호.

8) 김헌규, 2007, 위 글.

9) 이수진 2019, 위 글.

10) 김용덕 1978, 「향촌연혁고」『한국사연구』21․22. 동신대학교문화박물관, 2019, 『금성관Ⅱ』.

11) 이수진, 2007, 「조선시대 지방객사의 구조변화에 대한 일고찰」, 목포대석사학위청구논문.

12)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기 사회사 연구반, 2003,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아카넷.

13) 동신대학교문화박물관, 2019, 『금성관Ⅱ』.

2) 고지도와 읍지 기록을 통해 본 남평 읍치 조선시대에 읍치시설에 대한 기록은 왕조실록이나 일성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과 같은 관찬사서를 비롯하여 지리지(읍지)나 군현지도 같은 지리서, 그리고 개인 문집, 기행문, 일기 등 에서도 간간히 찾아볼 수 있다.

14) 이 중 지리지(읍지)는 각 지역에 대한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기 록물로, 일정한 항목과 규칙에 따라 서술하여 각 지방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 역 상호간의 비교를 가능하게 해주는 대표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15) 조선 전기에는 『세종실록지리지』와 같이 지리지가 사서에 포함되어 편찬되던 것과 달리 『경 상도지리지』(1425), 『팔도지리지』(양성지, 1497), 『동국여지승람』(1486) 등과 같이 별도의 지리지가 편찬되었다. 특히 『동국여지승람』은 이전 지리지에 비해 훨씬 체계적인 구성체제를 갖추고 있다.

영역, 건치연혁, 속현, 진관, 관원, 군명, 성씨, 풍속, 형승, 산천, 토산, 성곽, 봉수, 관방, 궁실, 누정, 학교, 역원, 창고, 교량, 불우, 사묘, 고적, 명환, 인물, 유우, 효자, 열녀, 제영 등의 항목을 두고 그에 해당하는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성체계 로 인해 『동국여지승람』은 후대 지리지 편찬의 모본이 되기도 하였다.

16) 조선후기, 중앙에서는 각 지방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더불어 효율적인 지방통치를 위 해 전국지리지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편찬된 것이 1757년 ~ 1765년 사이에 제작된 『여지도서』이다.17) 『여지도서』는 각 읍지의 첫머리에 해당 지역 지도를 첨부 하였으며, 지역별로 차이는 있으나, 호구, 방리, 도로, 전결, 제언, 진공, 토산, 봉름, 조적, 전 세, 대동, 균세 등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인 변동과 지방사회의 변화를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18) 이후,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로 인해 밀려오는 외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관제개편과 군제개혁 등의 여러 조치들과 함께 지리지가 편찬되었다. 이때는 소수의 사찬읍지도 편찬되었으나, 군사․재정적인 내용이 중심인 관찬읍지 편찬이 주를 이루었으며, 특히 고종조에는 1871년(고종 8), 1895년(고종 32), 1899년(광무3)의 지리지(읍지)와 함께 1872년(고종 9)에는 전 국지도책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19) 군현지도란 조선시대 지방행정 단위의 기본이었던 부․목․군․현을 대상으로 그린 지도로 군현도 또는 읍지도라 한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세계지도, 전국 전도 등이 제작된 반면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와 홍문과 주도하에 군현지도책이 제작되었다. 특히 영조대에 제작된 『해동지도』와 『여 14) 이수진, 2019, 「조선지대 읍성 연구」, 목포대 박사학위 청구논문. 15) 양보경, 1987, 「조선시대 읍지의 성격과 지리적 인식에 관한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 청구논문.

16) 이수진, 2019, 윗글. 17) 이수진, 2019, 윗글. 18) 최영희, 1973,『여지도서해설』, 국사편찬위원회 강행 영인본 『여지도서』. 변주승, 2006, 「『여지도서』의 성격과 도별 특성」, 『한국사학보』 제25호. 19) 이수진, 2019, 윗글. 지도서』는 전국 군현을 망라하여 지도와 지리지(읍지)를 결합하였다는 점에서 동일한 편찬목적 을 가지고 있다.

20) 이 두 지도가 완성된 후 약 20년이 지난 1770년경에는 방안식군현지도인 『여 지도』가 제작되었으며 이후 『청구도』(1834)와 『대동여지도』(1861)가 제작되었다. 이후 고종 조에는 두 차례의 양요를 겪으면서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1871년에는 전국적인 읍지 편찬작업을, 이듬해인 1872년에는 지도제작을 진행하였다.

이 지도들 은 군현뿐만아니라 여러 관방을 그린 지도까지 포함하고 있어 한 시기에 제작되어 수합된 지방지 도로는 가장 많은 양을 보유하고 있다.

(1) 조선 전기 조선시대 지리지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세종실록』「지리지」이나, 『세종실록』「지리지」 남평현조에 읍치에 대한 내용은 기록되지 않았다. 남 평 읍치시설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다.

『동국여지승람』의 증보편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남평현條에는 남평현의 경계를 비롯하여 건치연혁, 관원, 군명, 성씨, 풍속, 산천, 토산, 누정, 학교, 역원, 불우, 사묘, 고적, (신증)명환, 인물, 제영으로 항목이 나 뉘어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이는 『세종실록지리지』남평현條에 비해 훨씬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다른 지역과 달리 읍치 시설에 대 해서는 기록되지 않았다.

단지 ‘향하정은 객관의 남쪽에 있다(荷香亭 在客館 南)’는 루정조의 기록과 향교에 대한 기록, 그리고 題詠조에 기록된 金克己 의 시21)를 통해 객사와 향교 등의 읍치시설들이 조선 전기에 이미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김극기의 시 중 ‘竹樓開客館’라고 한 문구로 보 아, 당시 남평객관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모습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향교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 위치가 ‘在縣東一 里’로 되어 있는데, 이는 현재의 위치로 옮기기 전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20) 배우성, 1995, 「영조대 군현지도집의 편찬과 활용」, 『한국학보』21권 4호.

21) 『신증동국여지승람』 남평현 題詠조(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가시나무 사립문으로 인가를 가리었다. 김극기의 시에, ‘저녁에 남평군에 오니, 거칠은 연기에 눈이 어지럽구나. 竹樓로 객관을 열었고, 가시나무 사립문으로 인가를 가렸네. 마을에는 즐거운 소리 적 고, 시내와 산은 비참한 기색이 많구나. 누가 원이 되어 정치 잘하여서, 五袴의 노래를 부르게 할 꼬(荊戶掩人家 金克己詩 晩到南平郡,荒煙眩眼花。竹樓開客館,云云。里閈歡聲少,溪山慘色多。何 人裁美錦,五袴便興歌) 신증동국여지승 람 남평현 (2) 18세기 ①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1747년~1750년)

22) 비변사지도 중 호남지도는 7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군현지도 크기는 세로 102~104.5cm, 가로 78.5~80.56cm이다. 타도의 지도와 비교할 때 호남지도에는 지도 둘레에 24방위를 기록하여 상세 하게 방향을 설정해 두었으며, 도서나 제언 등을 자세하게 기록한 점 등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다른 지도에는 읍의 중심지에 ‘邑治’라는 글자만 기입한데 비하여 호남지도에서는 읍치를 상대 적으로 크게 그리고 관아건물 등을 그려놓은 곳이 많다.

지도에 표현된 남평현은 지금의 전남 나주시 남평읍, 다도면, 봉황면, 금천면, 산포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방형의 틀 안에 그려 놓았으며, 중앙에 縣內라는 지명을 써놓고 북동쪽에 객 사, 동쪽에 동헌, 남쪽에 사창, 남서쪽에 망미루, 북서쪽에 군기를 그려놓았다.

향교는 방형의 틀 밖 남쪽 구릉 사이에 그려져 있다.

향교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월연대와 봉산서원이, 서쪽에는 사직단이 표현되어 있다. 방형 틀 밖 북쪽에는 건물없이 관덕정이라는 글씨만 쓰여있다. 지도의 서북쪽 모서리에는 將軍이 머무르던 將臺가 그려져 있으며, 군사들이 훈련받던 陣場이 장대 아래 쓰여져 있다.

각 시설들은 대체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으며, 특히 객사와 동헌, 사창, 군기 등 읍 치시설과 읍치시설과 함께 현내에 위치한 망미루는 대체로 건물의 특징을 사실적으로 잘 표현하 였다.

② 『해동지도(海東地圖)』(1749년~1750년) 중앙에서 제작된 회화식 군현지도집으로, 책 크기는 세로 47.5cm, 가로 30cm이다. 총 370여장 의 지도가 8첩에 수록되어 있으며, 「천하도」와 같은 세계지도부터 중국, 일본 지역을 그린 외국 지도, 국경 지역지도와 도별도 및 330여 장의 군현지도와 진보가 설치된 지역의 군사 지도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해동지도와 같은 회화식 군현지도는 일정한 축척이 반영되어 있지는 않 지만 군현의 모습을 그림처럼 자세하게 그릴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남평현은 지금의 나주시 남평읍, 산포면, 봉황면, 다도면에 해당한다.

읍치가 고을의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이는 남쪽 덕곡면 부근에 있었던 鐵冶縣이 고려시대에 합쳐졌기 때문이다.

23) 읍 치는 별도의 구획없이 현내면에 건물만 그려져 있으며, 가장 북쪽에 객사를, 객사 아래 동쪽에 아사를 서쪽에 향교를 각각 표현하였다.

이외에 읍치 내에는 1동의 창고가 그려져 있으며, 읍치 의 동쪽에 봉산서원으로 추정되는 서원 1동이 그려져 있다. 지도의 서북쪽 모서리에는 將軍이 머 무르던 將臺가 크고 두드러지게 채색되어 있다.

각 시설들은 대체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으나, 장

22) 양보경, 1992, 「18세기 비변사지도의 고찰」, 『규장각』Vol.15,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 원. 23) 이기봉, 해동지도 남평현, 규장각한국학연구원(kyu.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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