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영 민주당 전남 지사 후보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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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 민주당 전남 지사 후보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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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4.13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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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 민주당 전남 지사후보 확정 민주당이 12일 박준영을 전남지사 후보로 최종 확정했습니다. 이는 민주당의 당헌.당규와 경선 규칙에 따른 당연한 결정으로, 깨끗한 선거를 통해 압승으로 당에 보답할 것을 약속합니다. 제가 민주당 도지사 후보로 최종 선택된 것은 저의 지난 1기 도정에 대한 도민들의 평가와 성원에 따른 것으로 우선 도민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 그동안 민주당을 살리라고 무한한 격려와 관심을 보내준 당원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번선거에서 민주당이 호남에서 뿐 만 아니라 수도권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수도권의 승리없이는 2012년 대선에서의 승리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도민 여러분께서도 저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수도권 후보들이 승리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사로 처음 당선된 이후 가장 낙후된 전남의 운명을 바꾸자고 도민들에게 호소하며 기업유치와 후손들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왔습니다. 앞으로 이같은 노력을 배가해 인구 200만 시대를 반드시 열도록 기반을 마련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준영 민주당 전남지사 후보 살아온 길 해방 직후인 1946년 전남 영암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박준영 후보의 인생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이를 깨치고 일어서는 한판의 드라마였다. 또 언론계와 관계, 정계를 넘나들며 한국현대사의 순간순간을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체험한 기록자이자 경험자였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유년시절이 지나고 목포중학을 다닐 시절 아버지가 갑자기 병석에 누우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그는 고교 진학을 미루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직접 땅을 갈고 거름지게를 져야했다. 어린 박 후보에게는 큰시련이었다. 가난의 고통, 그것은 비단 그의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를 살아가는 한국인들 대다수의 시대상이었다. 그러나 좌절만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해서든 공부를 해야만했다. 1년 농사일을 마친 뒤 서울 인창고 야간에 진학했다. 이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그야말로 고학의 연속이었다. 박 후보는 당시를 “어렵고 힘들지만 그나마 이렇게 공부를 할 수 있는 나는 행복하다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채찍질했다”고 회고했다.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1972년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그러나 박정희 독재의 광기가 극에 달했던 시절, 기자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의 인생에 첫 번째 터닝포인트가 된 것은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중앙일보 기자였던 그는 고향 광주.전남에서 일어난 살육의 현장을 외면한 언론보도에 항의하며 신문제작거부에 앞장서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해직당했다. 그는 2001년 7월에서야 광주민주화운동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30대 중반의 해직자에게 세상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좌절하지만은 않았다. 해직 이후 그는 그동안 굶주렸던 ‘공부’로 방향을 틀었다. 그 결과 1985년 미국 오하이오대학에서 신문학으로 석사를 받았고, 1997년 중앙일보 외신부기자로 복직됐다. 복직한 그는 뉴욕특파원을 거쳐, 중앙일보 편집부국장까지 지내며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또 한번의 인생의 전환점은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다가왔다. 호남인의 숙원이자, 민주세력의 염원인 정권교체가 사상최초로 이뤄진 시점이었다. 당시 그는 언론계를 떠나 대학강단에 설 준비를 하고 있다. 이듬해 3월 신학기부터는 서울 모대학에서 강의을 시작할 예정으로, 강의노트 준비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그는 이미 1997년 모교인 성균관대에서 정치학박사를 받은 상태였다. 새정부 출범 직전인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을 모시고 함께 일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고민했다. 그러다 결심했다. ‘어떻게 이뤄낸 만든 민주정부인가. 작은 힘이라도 보태 성공한 정권으로 만드는 것도 큰 보람이겠다’고 다짐하며 청와대행을 결심했다. 그가 맡은 첫 보직은 국내언론비서관. 이후 공보수석 겸 청와대 대변인, 국정홍보처장을 거치며 국민의 정부 5년동안 김대중 대통령의 입이자, 국민의 정부 얼굴 역할을 했다. 그가 잊을 수 없는 감격적인 순간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그는 당시를 회고하는 ‘평화의 길’이란 자전적 체험담을 출간하기도 했다. 남북간 화해의 장을 연 역사적 현장에 동행했고, 그 상황을 외부에 알리고 기록하는 역할을 했던 그의 자부심은 남다르다. 특히 200년 6월 15일 새벽. 바로 ‘남북공동선언문’, 훗날 ‘6.15선언’으로 알려진 남북간 화해 합의문을 직접 발표했던 그 긴박하고 행복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 이산가족 상봉, 남북철도 연결, 개성공단 등 지구상 마지막 남아있는 분단 냉전지역에서 얼음이 깨지고 민족공동번영과 장차 통일에의 주춧돌이 놓아졌기 때문이다. 국민의 정부 이후 그의 인생은 정치인으로의 대변신했다. 2004년 4월 고 박태영 전남지사가 자살하는 뜻하지 않았던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민주당은 열린우리당과의 분당과 탄핵바람으로 2004년 치러진 총선에서 참패한 상황이었다. 민주당 후보로 추대된 박 후보는 민주당 전남지사 보궐선거에 출마해 여론조사에서 상대후보에게 두배 가량 뒤져있던 상황을 대역전시키며 당선되는 저력을 보였다. ‘전남의 운명을 바꾸자’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박 후보는 2006년 재선을 거치며 6년동안 고향 전남의 발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왔다. 친환경농업, 신재생에너지, 미래산업 등 박 후보가 그려온 전남의 미래상은 이제 그 결실을 맺고 있다. 그리고 그 화룡점정의 마지막 임기를 향한 대단원의 발을 힘차게 내딛고 있는 것이다. / 정문찬기자ians0115naver.com - 영산강닷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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