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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행자로
  • 승인 2010.03.12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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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곧은 수행자로, 영혼 깨우는 문장가로 '비움의 삶' 큰 울림 | 기사입력 2010-03-11 23:06 | 최종수정 2010-03-12 00:21 맑고 향기롭게. 청빈한 삶과 수행 정신의 사표였던 법정 스님이 11일 열반에 들었다. 병석의 법정 스님이 마지막까지 곁에 뒀던 책들은 스님의 뜻에 따라 병원에서 신문을 배달해준 사람에게 전해진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법정 스님 입적] 법정 스님의 생애6·25전쟁으로 고뇌와 방황… 22세에 효봉선사 만나 출가하루 두짐씩 나무해서 불 지피며 수행, 무소유 몸에 배어96년 요정 대원각 시주받아 길상사 창건… 홀로 토굴 수행도큰스님 가셨다고 황망해 하는 대중들의 모습을 봤으면 "외잡스럽다!"고 호통 한번 갈겼을 법하다. 법정 스님은 그런 이였다. 법랍 반백년이니 승속의 경계에서 무애가(無碍歌)를 부른 듯 누가 타박을 놓으련만, 꼬장꼬장 미간을 구기며 안경 너머로 쏘아내는 눈빛은 그 자체로 늘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이었다. 종신토록 여법한 수행자였다. 사람들은 그의 삶과 문장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을 흔히 수정에 빗댔지만, 기실 그것은 오동지섣달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 같은 것이었다. 스님은 그리 살다 그리 먼저 언덕을 넘어갔다."나는 아마 전생에도 출가수행자였을 것이다."스님은 1932년 2월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에서 태어났다. 속가 성은 박씨. 개명한 집안의 자식이었다.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전남대 상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열여덟 나이에 한국전쟁과 맞닥뜨렸다. 죽음과 삶이 무연히 교차하는 아수라장을 겪은 섬세한 영혼은 결국 스물둘에 먹물옷을 입는다. 훗날 스님은 이렇게 회고했다. "한 핏줄, 같은 이웃끼리 총부리를 마주대고 미쳐 날뛰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 마주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밤새워 묻고 또 물으면서 고뇌와 방황의 한 시절을 보냈다."집을 나온 스님은 오대산으로 향했으나 눈으로 길이 막혀 서울 안국동 선학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기서 당대의 선지식 효봉(1888~1966) 선사를 만나 머리를 깎았다. 절집이나 세간이나 가난과 번뇌가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하루 두 짐씩 나무를 해다가 아궁이에 불 지피는 것이 스님의 수행이었다. 무소유는 말이 아니라 존재의 양태로 그의 몸에 각인됐다.스님은 그렇게 법을 참구하는 납자이고자 했으나, 그의 글재주는 먹물 잠상으로 가려지지 않았다. 종단은 책을 펴낼 일 있을 때마다 그의 손을 빌렸다. "원고지 칸을 메우는 업"으로 스님은 종단 안팎에서 이름을 얻게 된다."비바람에 허물어지지 않는 집을 세우라"1970년대는 산문 속에 혹은 지면 속에 날카로운 문장으로만 있던 스님을 저자로 끌어내렸다. 민주화에 앞장선 인사들과 교류하며 이런저런 반독재 성명에 이름을 올렸다. 기관원이 스님의 곁을 맴돌았고 어용화된 종단은 그를 무슨 보균자 취급하듯 했다. 이판과 사판이 둘이 아니라는 믿음이 스님을 누구보다 꼿꼿한 투쟁가로 비쳐지게 했다.그러나 1975년 그는 다시 걸망을 지고 산으로 향한다. 그 해 봄 인혁당 사형 집행이 결정적이었다. 분노와 자책이 함께 닥쳐왔다. 적개심을 품었다는 사실이 수행자로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스님은 훗날 이렇게 얘기했다. "불이 나면 내남없이 모두 나서서 불을 꺼야 합니다. 하지만 불이 잡힌 뒤에는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제 삶의 몫을 해야 합니다.""마음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바늘틈도 없는 원칙주의에 깔깔한 성격. 법정 스님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다. 그의 글에선 무른 습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현대의 고승 경봉(1892~1982) 스님은 법을 묻는 제자에게 "야반 삼경에 문빗장을 만져보거라"라고 말했다는데, 법정 스님의 글은 종이에 새긴 차가운 쇳덩이 같았다.삶은 더했다. 세상이 추켜세울 때마다 그는 토굴을 짓고 산으로 들어갔다. 1996년 고급 요정이던 서울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주 받아 길상사를 창건했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다시 홀로 강원도 산굴로 들어갔다.하지만 스님에겐 남모를 따뜻함이 있었다. 그의 글을 편집하는 일을 했던 한 출판인은 이렇게 기억했다. "당신께서 농사 지은 걸 보내주시곤 했는데 정성에 모두 놀랐다. 옥수수를 다듬는데 끝을 얼마나 정갈하게 손질했는지 먹기 죄송스러울 정도였다." 만년의 스님은 이런 말을 했다. "스위스에서 온 어느 철학자가 후박나무 아래서 이렇게 물었다. '혼자 이런 산중에 사는 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나는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아직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어떤 틀에도 갇힘 없이 내 식대로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걸 보면,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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